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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은 대마도'의 날입니다!대마도를 정벌한 날 기념하기 위한 조례 제정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 칭함
조금제/독도지킴이 대한민국 대마도본부 본부장

경남도 마산시의회(현 창원시의회)는 일본 시마네 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2월 22일) 조례를 제정한 데에 대응해 2005년 3월 18일 대마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이날 제정된 조례는 쓰시마 섬이 한국 영토임을 대내외에 각인시키며 영유권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조선 세종대왕 초기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발한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한다는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시마네 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폐기 촉구 결의안을 논의하다 공격적으로 하자는 분위기가 강해 ‘대마도의 날’ 조례 제정을 추진했다고 한다.

마산포를 출발한 다음 날인 1419년 6월 20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는 227척의 함선과 1만 7,000여 명의 수군을 이끌고 대마도에 이른 뒤 두지포(頭知浦) 앞바다에 함선을 정박했다. 이때 해안선에 있다가 조선 함선이 도착한 사실을 확인한 왜구 50여 명이 조선군에게 저항하다 달아났다.

이종무는 본격적인 왜구 소탕에 앞서 대마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이종무는 처음에는 조선에 귀화한 왜인 지문(池文)을 보내 설득했고, 두 번째는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의 글을 보냈다.

그러나 적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오지 않았다. 이에 조선군은 수색 작전에 들어가 해안가의 적선 129척을 찾아내 20여 척은 압수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또 적병 114명을 참수하고, 21명을 사로잡았으며, 적의 집 1,939채를 불태웠다. 포로로 잡혀 있던 중국인 131명을 구해 내기도 했다. 이어 이종무는 대마도 안쪽으로 달아난 적들이 식량이 부족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목책을 설치해 장기전에 대비했다.

한편으로는 다시 수색조를 보내 적선 15척을 불사르고, 집 68채를 불태웠으며, 적군 9명을 죽였다. 또 조선인 8명과 중국인 15명을 구출했다.

6월 29일에는 조선군 본대가 함선에서 내려 육상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 박실(朴實) 부대가 대마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가 적의 복병에 기습당해 장수와 군사 수십 명을 잃고 함선으로 패주하였다. 그러자 이를 뒤쫓아 온 적군이 함선을 공격하다가 물러났다. 한 차례 타격을 입은 이종무는 더 이상 육상전을 벌이지 않고 대신 함선으로 포구를 에워싼 채 적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이때 도도웅와가 항복의 뜻을 밝히며 강화를 요청하는 글을 보냈다. 도도웅와는 ‘7월에 태풍이 불 것이니 조심하라’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이종무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태풍을 염려해 7월 3일 거제도로 돌아왔다. 이것이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다. 기해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한다.

당시 대마도 정벌에는 이종무의 아들인 사헌부 감찰 이승평(李昇平)도 참전했다. 이종무가 귀환한 직후인 7월 6일 좌의정 박은(朴訔)은 중국에서 노략질을 하던 왜구가 그들의 소굴인 대마도로 돌아가고 있으니 이종무를 보내 이들을 격퇴시키자고 태종에게 제안한다. 하지만 대마도 정벌 과정에서 병사 수십 명을 잃었고, 이미 대마도주가 강화를 요청한 상태여서 출병은 이뤄지지 않았다.

조선이 대마도를 친 것은 결정적으로 그해 5월 왜구의 무리가 잇달아 조선을 노략질한 데 따른 것이었다. 충청도 관찰사 정진(鄭津)은 5월 7일 조정에 급보를 올렸다. 왜구의 배 50척이 비인현(庇仁縣, 충남 서천) 도두음곶에 침략해 조선의 함선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는 내용이다.

당시 만호(萬戶) 김성길(金成吉)은 술에 취해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에 빠지는 바람에 왜구를 막아낼 수 없었고, 그 아들이 왜구와 싸우다가 끝내 죽임당했다. 왜구는 이어 황해도 해주 연평곶까지 나아가 절제사 이사검(李思儉)에게 쌀 40섬을 받고 물러났다.

당시 군권을 쥐고 있던 상왕 태종은 이 같은 보고를 받고 5월 14일에 급히 중신 회의를 소집하여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태종은 중풍으로 온천을 다니며 요양 중이었으나 사안이 시급함을 감안해 직접 대마도 정벌 사안을 주관했다. 이로써 총지휘관으로 임명된 이종무는 6월 19일 대마도 정벌길에 오른다. 이종무는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의 편에 서서 그를 적극 돕는 등 태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다.

대마도 정벌에 참여했던 장수들은 같은 해 8월 10일 상왕 태종과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선양정(善養亭)에서 주재한 잔치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영의정 류정현(柳廷顯)은 “전하께서는 왕조를 어렵게 세웠다는 것과 왕조를 지켜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매일 생각하셔야 한다”고 고한다. 이에 태종은 “그 말이 옳으니, 임금(세종)은 새겨듣도록 하라.” 하고 이른다.

하지만 이 같은 환영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사헌부가 박실의 육상전 패배에는 이종무의 책임이 있다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태종은 이종무를 보호하기 위해 사헌부의 탄핵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사헌부는 중죄를 지었다가 사면된 김훈(金訓)과 노이(盧異)를 이종무가 조정의 허락도 받지 않고 대마도 정벌에 참여시킨 것을 다시 문제 삼았다. 사헌부는 “아무리 무술이 뛰어나지만 불충한 인물을 전쟁에 참여시키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며 사형을 건의했다.

하지만 태종은 1419년 11월 이종무를 하옥시키고, 이후 한양 바깥으로 내쫓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대마도 정벌의 주인공인 이종무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하옥 당시 이종무는 국문을 받는 과정에서 “전장에서 죽었어야 하는데, 살아 돌아와 늙은 놈이 욕을 당하는구나”라며 비통해 했다고 한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이후 한반도에 대규모로 왜구가 들끓는 일이 사라졌고, 이를 계기로 조선은 왜인에 대해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응징하는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선린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마도주는 조선을 신하의 예로 섬기고 조공을 바치며, 대마도를 경상도 일부로 복속하기를 청했다.

조선은 대마도가 섬의 특성상 식량과 물자가 부족하다는 점을 감안해 공식적인 무역을 허용하였다. 세종은 즉위 8년인 1426년에 동래 부산포, 웅천(熊川, 창원) 내이포(乃而浦, 제포), 울산 염포(鹽浦)의 3포를 개항했다.

세종 25년인 1443년에는 조선과의 왕래가 허락된 무역선인 세견선(歲遣船)을 1년에 50척으로 제한하고, 대마도주에게 내리는 세사미두(歲賜米豆)를 1년에 200석으로 규정하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맺었다. 당시 조선은 왜인과의 무역에서 구리나 유황, 약재, 염료, 향료 등 무기의 원료나 기호품을 구입했고, 왜인은 식량과 옷감, 서적 등 생활필수품이나 문화재를 가져갔다.

3포에서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당초 60호로 한정한 왜인 상주 인구는 세종 말년에 이르러 2000명까지 늘어났다. 이처럼 세종 당시의 대마도 정벌은 고려 공민왕 이후 수시로 한반도를 노략질하던 왜인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중종(中宗, 재위 1488~1544) 즉위 이후 조선과 일본의 국내 정치 상황이 변했고, 왜구가 잇달아 노략질을 하자 계해약조의 조항들은 갈수록 강화됐다. 무역 통로를 열어 주었다가, 왜인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다시 무역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대마도를 관리한 것이다.[출처: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조선땅 대마도는 대마도주가 1869년 일본의 "판적봉환" 에 일본에 귀속됐다고 주장한다. 판적봉환은 1869년 7월 25일, 일본의 메이지 시대 초기에 행해진 조치로, 다이묘들이 일본 천황에게 자신들의 '영지(領地)'와 '영민(領民)', 즉 '판적'을 반환하였던 일이다. 에도 막부의 소멸과 함께 메이지 신정부는 기존의 막번 체제를 고쳐 새로운 지방제도를 수립하려 했다.

끊임없이 독도를 다케시마로 칭하고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영토 침탈야욕에 맞서 우리도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해 '6월 19일 대마도의 날'을 영원히 기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경남뉴스투데이  webmaster@knnew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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