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조금제의 독도이야기
대마도는 본시 우리땅이었다!
▲ 조금제독도지킴이 대한민국 대마도본부 본부장

대마도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우리의 땅이라는 사실을 고대부터 근거로 알아본다.

상고시대(기원전 약 2000년~ 서기 300년)에서 최고 오래된 기록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과 왜인전(倭人傳) 대마국은 구야(狗耶, 가야)에서 강건너 1000여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인 대관(大官)은 비구(卑狗)라 하고, 부관(副管)은 비노모리(卑奴母離)라고 한다. 대마도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절해의 고도이며 넓이는 대략 400여 리에 이른다.

환단고기(1911년 홍범도, 오동진이 자금지원으로 계연수가 편찬) ‘고수래국본기’에는 예로부터 큐수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곳으로 본래 왜인이 살던 곳이 아니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대마도인으로서 호공이라는 사람이 신라에 벼슬을 하였으므로 당시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서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 대마도주가 고려의 만호 벼술을 가진 사신(使臣)으로 파견된 이래 대마도는 600여 년간 조선과 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 또는 조공회사(朝貢回輝)의 관계를 맺어온 속방(屬邦) 이었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고려 문종 36년(1083)부터 공민왕 17년(1368)사이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서는 세종 원년(1419) 6월 19일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己亥東征) 이에 따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병선 227척과 장병 1만 7,358명을 인솔해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의 천해만과 오자키·후나고시·진나를 공격했다.

대마도에 상륙한 이종무 군은 적선 129척을 나포하고 왜구가 사는 집 1939호를 불질러 태워버렸다. 생포한 왜구는 12명이었고 참수(斬首)한 왜구는 114명이었다. 내친 김에 이종무 군은 왜구들이 심어 놓은 곡식을 베어버려 요행이 산 속으로 도망친 자들도 굶게 만들었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후 대마도는 경상도 동래부의 소속도서로서 편입되어 조선정부의 통치에 임했다.


세종 25년(1443)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이 체결되어 대마도주는 1년에 50척의 세견선(歲遣船)과 200석의 세사미(歲輝米)를 특전으로 받게 됐으며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 ‘팔도 전도’에는 독도 뿐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대상’이라고 적혀있다.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구한 말에는 1859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으로 개항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유도에 의해 국내 정세가 크게 변했다. 이에 따라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도 일변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대마도가 대행하고 있던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직접 관장하려 했다. 1868년 1월 3일 도쿠가와 막부의 조번체제(朝藩體制)가 붕괴하고 왕정복고·왕위 친정체제를  구축 하려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로써 웅번(雄藩)들은 판권봉환(版權奉還·왕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각번의 영주들의 영역권을 천황에게 바치는 것)에 들어가, 도쿠가와 막부의 제15대 장군인 도쿠가와 시게노부(德川慶喜, 1837∼1913년)도 정권을 개혁 조정에 반환하게 되었다. 1871년 8월 29일에는 폐번치현(廢藩置縣·막부 시절의 번을 없애고 근대적 지방 행정기관인 현을 두는 것)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외번부용(外藩附庸)의 대마도주 종의달(宗義達, 1847~1902)도 대마도를 판적봉환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종의달은 조신(朝臣)과 근위소장(近衛小將)이라 칭하고 이스하라(嚴原) 번지사(藩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1877년 대마도는 나가사키현에 편입되면서, 현에 속한 지방 행정지로 격하되었다.

광복이후(1945년 이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8월18일 전격적으로 '대마도 반환요구'를 발표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 이하 내각이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9월9일 재차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일본의 요시다 총리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이대통령의 요구를 막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를 전후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 방해되는 언사로 받아들이고 이대통령의 발언을 제지했다. 그 후 이대통령은 공식적으로나 문서상으로는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역설하였다. 미 군정 시기인 1948년 2월 17일에 열린 제204차 입법의원 본회의에서 입법의원 허간용(許侃龍·서북도 관선의원) 외 62명은 대마도를 조선영토로 복귀시킬 것을 대일강화조약에 넣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정부를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 폭주로 연기되다 회기가 종결됨으로써 실현을 보지 못했다.

상기에 열거했듯이 대마도가 역사적으로 우리의 땅임이 명백하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의 허락도 받지않고 슬그머니 자기네 땅으로 편입하였다. 또한, 대마도를 지키기 위한 술책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을 한다는 소문도 있다. 독도를 수호하고 대마도 환수를 위해 매진합시다.

경남뉴스투데이  webmaster@knnewstoday.co.kr

<저작권자 © 경남뉴스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글

카카오스토리

경남뉴스투데이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