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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용 위대한수령 이승만 朝鮮人民共和國 = 主席 李承晩 文敎部長 金性洙 1945.9. [ 朝鮮人民共和國 = 主席 李承晩 文敎部長 金性洙 ] 인공의 정부부서 발표 연월일1945년 09월 14일 출전매일신보 1945년 09월 15일 인공의 정부부서 발표 朝鮮人民共和國에서는 지난 6日 全國人民代表會議에서 선출된 인민대표들이 그동안 연일 정부조각에 주력한 결과 다음과 같은 부서를 결정 14日 政府로부터 발표하다. ◊ 朝鮮人民共和國政府 部署 主席 李承晩 副主席 呂運亨 國務總理 許憲 內部部長 金九 (臨時代理 許憲) 外交部長 金奎植 (臨時代理 呂運亨) 軍事部長 金元鳳 (臨時代理 金世鎔) 財政部長 曹晩植 保安部長 崔容達 司法部長 金炳魯 (臨時代理 許憲) 文敎部長 金性洙 (臨時代理 李萬珪) 宣傳部長 李觀述 經濟部長 河弼源 農林部長 康基德 保健部長 李萬珪 遞信部長 申翼熙 (臨時代理 李康國) 交通部長 洪南杓 勞動部長 李胃相 書記長 申康玉 法制局長 崔益翰 企劃局長 鄭栢 * 김성수를 친일파라 보았다면 인공이 문교부장으로 선정했을 리가 없습니다. 주목할 점은 빨갱이들이 뽕가는 "위대한 수령"은 인공 명단에 없으며 인공도 추대한 우리민족의 "위대한 수령"은 이승만이란 사실입니다. * 1945.10.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 ......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의 추대는 조선인민 총의이며 ........ ......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다. ........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이승만 귀국환영 담화 발표 매일신보 1945년 10월 18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제1차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으로 추대된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는 동시에 환영준비위원을 선출하고 환영회 준비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이승만박사는 드디어 귀국하였다. 3천만 민중의 경앙대망이었던 만큼 전국은 환호에 넘치고 있다. 우리 해방운동에 있어서의 박사의 위공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의 추대는 조선인민 총의이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해방 조선은 독립조선으로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17일 오후 2시 부주석 呂運亨, 국무총리 許憲 양씨가 崔容達, 李康國 양씨를 대동하고 조선호텔로 이박사를 방문하여 환영의 인사를 드린 다음 8월 15일 이후 경과에 대한 보고로 문서와 참고자료를 수교하였다. 원로여정에 피로하실 터이므로 후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일행은 돌아왔다. ................................................................................................................... [ ..... 이승만 32%, 김구 22%, ...... ..... 박헌영 10%, 김일성 3% ...... ] ........................................................................................................................... 정치지도자 지지도를 묻는 조사에서는 이승만 32%, 김구 22%, 김규식 9% 등 우파 쪽이 72%인 반면, 여운형 13%, 박헌영 10%, 김일성 3% 등 좌파 쪽은 28%에 그쳤다. 같은 해 “미국인이 소련인보다 더 심한가”란 질문에는 ‘아니다’(68%)가 ‘그렇다’(16%)를 압도했다(전상인, ‘고개숙인 수정주의’). ........................................................................................................................ [ ......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朴憲永 84인 1% 强 ........ ] 동아일보 1946년 07월 23일 한국여론협회, 초대 대통령과 식량정책 등에 대한 여론조사결과 韓國與論協會는 (略) 17일 서울시내 鍾路 南大門 鍾路 4정목의 3개소 통행인 6,671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문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는데 그 結果는 다음과 같다. (問)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金九 主席 702인 11% 弱 金奎植 博士 694인 10% 强 呂運亨 689인 10% 弱 朴憲永 84인 1% 强 其他 110인 2% 弱 모르겠다 2,476인 37% 强 .......................................................................................................... ......................................................................................................................... 미군정 정보보고서는 조봉암이 1946년 9월 신당 창당과 관련된 집회에서 5퍼센트밖에 지지층을 가지지 못한 공산당이나 극우세력이 정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나는 95퍼센트의 중간층을 중핵으로 한 정당을 조직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 ** 김일성 [ ......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 ] ................................................................................................................................ 게다가 공산주의는 공산국가 소련과 결부되어 폭동, 혁명, 테러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공산당 대신 영국의 노동당(勞動黨)과 같은 온건한 복지정당으로 위장하는 것이 편했다. 그 때문에 김일성은 자신의 조직을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바꾸고, 남한에서도 박헌영, 여운형, 백남운의 좌파 3당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통합하게 했던 것이다.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 사건에서 많은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고 다치자, 김일성은 현지로 찾아가 유감을 표시하면서,“우리 노동당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지,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요”라고 자신을 감추었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로 위장한 김일성의 전술은 성공했다. 그러므로 그는“그때에(해방 직후에) 우리가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만족스럽게 회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공산주의 혁명’도 ‘민주적 개혁’으로 둔갑했다. 그리하여 토지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몰수된 지주들의 토지에 대한 경작권이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화폐 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상인들의 자본이 몰수되었다. 그 결과로 기득권을 가진 식자층과 유산계급은 뿌리가 뽑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 사회에 인재 부족의 재앙을 가져 왔다. 이른바‘민주개혁’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사라졌는가는 김일성대학을 비롯한 대학들의 이공계(理工系) 신입생이 부족한 사실로 나타났다. ............................................................................................................................ 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1002&num=390 2010년 여름호 [특집] 이승만 시기의 보수세력과 민주제도 [이주영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 김일성도 ‘전국을 통치할 분은 이 박사밖에 없다’고 ......... ] .............................................................................................................. ―독촉에는 누가 참여했습니까. “정확한 기억은 못하는데 대부분 참여했지.” ―이 박사가 만든 단체에 어떻게 공산당까지 참여했습니까. “당시 이 박사는 민족의 어른이었어. 임시정부 대통령을 했고 대한제국 때부터 독립운동을 한 분이니 다들 이 박사를 모시려했지. 건준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에 주석으로 추대됐고, 북의 김일성도 ‘전국을 통치할 분은 이 박사밖에 없다’고 했었어.” ..................................................................................................................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8200508070248.html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이야기]6 당시 이승만박사, 백범과 소홀했다고 친형제 같았어 이을식옹이 말하는 이승만과 '독촉' 요즘 사람들 건준만 알고 독촉은 몰라… 해방정국 주도했지 입력 2005.08.07 * 1919. [......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 ....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 ] ............................................................................................................................ 3·1 운동은 40대 중반에 이른 李承晩과 金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李承晩은 3·1 운동 이후에 국내외에서 선포되거나 논의되던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 『內外地의 인심이 李承晩에게 瀑注해』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는 현순의 표현대로 이때는 이미 李承晩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31. 임시정부 국무총리 李承晩 1921.1. 「獨立新聞」 [ ..... 국민아, 우리 임시대통령 李承晩 각하가 上海에 오시도다. ......... ......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 ] 孫世一의 비교 評傳 (3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임시대통령 각하, 上海에 오시도다 』 孫世一 ............................................................................................................ 1921년 1월1일자 「獨立新聞」이 李承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그의 지도력에 대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민아, 우리 임시대통령 李承晩 각하가 上海에 오시도다. 우리는 무슨 말로 우리의 元首를 환영하랴. 우리 民國의 첫 원수를 우리 故疆(고강)의 서울에서 맞지 못하는 비애를 무슨 말로 표하랴. 국민아, 통곡을 말고 희망으로 이 결심을 하자. 우리의 원수,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대통령을 따라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기에 일신하자. 합력하자. 그는 우리의 大元帥(대원수)시니 獨立軍人되는 국민아, 우리는 그의 지도에 순종하자. 그의 명령에 복종하자. 죽든지 살든지, 괴롭거나 즐겁거나,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진실로 우리 대통령을 환영할 때에 우리가 그에게 바칠 것은 화관도 아니오 頌歌(송가)도 아니라 오직 우리의 생명이니, 우리의 생명이 가진 존경과 지식과 기능과 심성을 다 그에게 드리고, 마침내 그가 「나오너라」하고 戰場으로 부르실 때에 일제히 「네」 하고 나서자. 민국 3년 원단에 국민아, 일심으로 「우리 대통령 李承晩각하 만세」를 높이 부르자.〉32)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면한 위기 국면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자기최면적인 환호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 이때의 李承晩과 이동휘의 논쟁과 관련하여 金九는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부 총장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을 좇아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이로 인해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 불일치로 때때로 논쟁이 일어나 國是(국시)가 서지 못하고, 정부 내부에 괴이한 현상이 거듭 일어났다.〉37) 임시정부의 보위를 책임지고 있는 金九의 고충이 어떠했는지가 느껴지는 술회이다. ............................................................................................. 대통령제를 위원회제로 바꾸자는 이동휘의 제안에 대해서는 李承晩은 물론 안창호도 반대했다. 그러자 이동휘는 사임을 청원했다. 李承晩과 각원들이 극력 만류하였으나 이동휘는 1월24일에 〈나의 쇄신의안을 정무회의에 제출하였으나, 한마디 심의도 없이 구겨 없앴기 때문에 나의 실력으로서는 이 난관을 타개하기 어렵다〉41)는 요지의 선포문을 발표하고 광동으로 가버렸다. 내무총장 이동녕이 그를 대신하여 1월25일에 국무총리 대리 겸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동휘의 사임은 곧 한인공산당의 임시정부 탈퇴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동휘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친미 우익그룹에 지도적 역할을 계속 맡겨 두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라고 판단하여 임시정부에서 탈퇴했다고 적고 있다.42) 그리고 한인공산당의 이러한 결정은 「대중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최고혁명기관」을 다시 조직하는 계획과 관련되어 있었다.43) 그것은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었다. ..................................................................................................................... 1923 「敬告海外各團體書」 [ .... 기성정부를 옹호하고 망령되이 스스로 요동을 일삼지 말 것 ...... ] ......................................................................................................... 上海에서는 1923년 1월에서 6월까지 國民代表會議가 열렸다. .............................................................................. 國內指導者들의 「敬告海外各團體書」 때를 같이하여 국내의 李商在, 崔南善, 吳世昌, 韓龍雲, 朴泳孝, 姜邁(강매)의 여섯 사람 명의로 된 「敬告海外各團體書」라는 한문성명서가 배포되어 화제가 되었다. 성명서가 한문으로 된 것은 중국인들에게도 읽히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다. 〈기미년 혁명운동이 이미 다섯 해가 되었다. 시체는 산같이 쌓였는데, 성과는 한삼태기에도 아직 까마득하다. 망국의 폐허에 벼와 기장만 슬피 무성하고, 부형의 원수로 하여 가슴 아프다. 우리는 투옥되었던 몸으로 나가서 만나자 하여도 나가지 못하고, 하늘 너머 정부를 바라보면서 朱나라 곡식으로 연명하는 것(朱나라 곡식을 먹는 것을 거부한 伯夷叔齊의 고사를 원용한 말―필자)을 부끄러워한다. 일찍이 제공을 앙모한 것은 제공이 수십년래로 公을 붙들고 義를 앞세워 조국의 원수갚기를 먼저하고 私怨(사원)을 뒤로 하며,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분투하여 물욕의 사악을 물리치며 天良(천량 陽明學의 용어로서 「하늘이 준 양심」이라는 뜻―필자)을 회복하려 함 때문이었다. 천량을 회복하는 자는 능히 나라를 회복하는 자요, 물욕을 물리치는 자는 능히 적을 물리치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 여항 간의 늙은이들은 밤중에 분향하고 그 성공을 기도하며, 옥중에서 뼈만 남아 한낮에 사형대에 올라 눈을 감고 죽음으로 나아간다.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풍편에 전하는 것은 괴이한 소리요 날마다 들리는 것은 가련한 소식인가. 지방열로 기치를 각립한다하며 黑河에서 도륙을 하였다 하며, 공금을 횡령했다 하며, 당을 지어 분쟁한다 하니, 이는 곧 망국하는 일이오 광복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슬프다! 과연 도적이 밖에 있어서 동포를 잡혀 장물을 나누어 가지며, 광복을 빙자하여 사사 일을 도모하는 자가 있는가. 어찌 불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저절로 나겠는가. 저자에 호랑이가 나왔다는 소리를 세 번 전하매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한다. 우리는 오래 참상을 겪어 낙심한 것이 매우 많다. 시비는 알고자 하지 않으며 개인적으로 편향되는 바가 없으므로 상관하고자 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민족을 위한 일이므로 상관하지 않을 수 없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자 하나 국가를 위한 일이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적성과 충정으로 삼가 포고한다.〉 그러면서 성명서는 구체적으로 해외독립운동자들이 실행해야 할 과제를 제시했다. 그것은 1)지방구별을 철저히 배제할 것, 2)비법 불의한 무리를 엄중히 조사하여 징계하고 판별할 것, 3)사사 단체를 해산하고 조리에 따라 힘을 합쳐 진행할 것, 4)기성정부를 옹호하고 망령되이 스스로 요동을 일삼지 말 것의 네 가지였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단호한 말을 덧붙였다. 〈이 네 가지를 밖에서 실현하면, 우리는 만 번 죽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힘을 다하여 옹대할 것이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내지에 있는 2천만의 일은 제공이 감히 물을 바가 아니다. 바라건데 제공은 속히 회개하고 잘못을 메꾸어 우리로 하여금 함께 오욕을 겪지 않게 하기 바란다. 작은 마음이 바다를 격하여 글로 뜻을 다 펴지 못한다.〉95) 수천 장 인쇄하여 同胞들에게 배포 성명서가 작성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연서한 이상재, 오세창, 한용운은 각각 기독교, 천도교,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며, 개화파 고관이었던 박영효는 국내의 지배층 사회를,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최남선은 지식인층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강매는 주시경의 제자로서 배재학당 교사로 있으면서 3·1 운동에 참여했고, 1922년 1월에 발기한 사회주의 단체인 신생활사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던 인물이었다.96) 국민대표회의에 국내에서 기독교, 천도교, 불교의 대표가 파견되지 않은 것과 좋은 대비가 된다. 성명서는 국민대표회의를 반대하고 임시정부를 옹호하던 인사들뿐만 아니라 안창호 등의 개조파 인사들에게도 큰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李承晩이 이 성명서를 받아 본 것은 2월 17일이었다. 이상재가 보내 온 것이었다. 李承晩은 이상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내주신 「경고해외각단체서」를 받들어 읽은 나머지 감격과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여 눈물이 있고서야 능히 면했사오며…〉97)라고 감격해 하고 있다. 「태평양잡지」는 이 성명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면서 〈우리 해외 동포들에게 감히 고하노니 이 내지에서 나온 글을 보고 우리가 감동한 마음이 없으면 이는 한족의 피를 가진 자이 아니라 하겠도다. 이 말을 듣고 회개치 아니하면 한족의 심장을 가진 자이 아니라 하겠도다〉라고 적었다.98) 그리고 李承晩은 선언서의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문 몇천 부를 인쇄하여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동포들에게 배포했다.99) ................................................................................................................. 孫世一의 비교 評傳 (40)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金九, 內務總長되어 國民代表會議에 해산 명령 1926.4. 김좌진 [ ...... 오직 우리의 사모하는 각하의 지도하심만 빌고 기대 ...... ..... 오직 우리는 각하의 지도를 받아 사업의 전도를 진행코저 하오니, 통량하신 후에 다음 조항의 선후판법을 明敎하오서 ........ ] .......................................................................................................... 이상룡은 취임사에서 천명한 대로 李(이탁), 金東三, 吳東振, 李裕弼, 尹世葺(윤세용), 玄天默, 尹秉庸, 金佐鎭, 曹成煥의 9명을 국무원으로 추천하여 10월10일과 12일의 임시의정원에서 가결되었다.11) 이상룡이 추천한 국무원 9명은 상해에 있던 이유필 이외에는 모두 이 시기의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세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와 新民府와 參議府의 지도자들이었다. 이탁은 정의부의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장이었고, 김동삼, 오동진, 윤병용은 모두 중앙행정위원이면서 외무위원장, 생계위원장, 교통위원장을 각각 겸하고 있었다.12) 유명한 청산리전투를 지휘했던 김좌진과 조성환, 현천묵은 1925년 3월에 북만주지역에서 새로 조직된 신민부의 간부들이었다. 김좌진과 조성환은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군사부위원장겸 총사령관과 외교부위원장을 각각 겸임하고 있었다. 현천묵은 사법부에 해당하는 檢査院 원장이었다.13) 대한독립단, 한족회, 大韓統義府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했던 윤세용은 이때는 압록강 대안의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참의부의 참의장이었다.14) 金佐鎭 등은 李承晩에게 忠誠편지 보내 그러나 이러한 인선은 당사자들의 동의를 거쳐서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새로 선임된 국무원들 가운데 이유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취임하지 않았다. 국무원에 선임된 정의부 간부들이 부임하지 않은 것은 중앙의회가 결의한 4개항의 선결조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상룡이 독단으로 국무령에 취임한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신민부 간부들이 국무원 취임을 거부한 데에는 더욱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개조파그룹이 취한 일련의 조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신민부 간부들은 1921년 이래로 白純을 통하여 李承晩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5) 그러한 사정은 신민부 창설 1주년이 되는 1926년 4월15일자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金爀과 김좌진, 朴性儁(박성준) 두 위원이 연명으로 李承晩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해외 성상에 각하의 분투 노력하심은 우리 일반이 감읍하는 바외다. 저희들은 경신참변 이후에 북쪽으로 가서 북만주 일우에서 옮겨 다니던 중 작년 3월경에 北路軍政署, 義軍府, 光復團, 獨立團 및 내지 각 단체와 북만주 각 지방 주민대표들과 함께 통일회를 촉성한 결과 신민부를 조직한 이래 1년 동안 軍民行政을 실시하고 있는 바, 지금은 차츰 정리되어 기반이 점점 확고해지고 있어서 다행이오나, 어찌 이것으로써 대업의 기본이라 하오리까. 3·1운동이 발생한 이후로 성립된 임시정부는 우리 운동의 최고기관이 되어 절대로 대동적 통치의 본위가 되지 않고는 밖으로 국제의 동정을 구하며 안으로 군중의 정신을 全一케 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견지에서, 연래로 다소의 노력과 고통을 겪지 아니함은 아니오나, 시국의 복잡은 갈수록 더욱 심하야 수습책이 큰 난관에 이르렀으니, 우러러 바라건대 각하는 東風西潮(동풍서조)가 점점 박두한 위기를 당한 우리 민족의 전도를 장차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저희들이 연래로 荒漠(황막)한 구석에 있으면서 오직 우리의 사모하는 각하의 지도하심만 빌고 기대하거늘 불행히 야욕자의 간사한 농간과 私利를 도모하는 자의 편견으로 우리 운동의 전도를 가로막으며 사업의 발전을 저지케 함은 참으로 통탄스러운 바이 올시다. 그러나 최후의 노력은 우리의 천직이므로 오직 우리는 각하의 지도를 받아 사업의 전도를 진행코저 하오니, 통량하신 후에 다음 조항의 선후판법을 明敎하오서 우리의 목적을 속히 도모케 하심을 바라나이다.〉16) 李承晩이 임시의정원에서 탄핵 면직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李承晩을 임시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면서 이들은 개조파그룹을 독립운동의 방해세력으로 규정하고 「선후판법」으로 1) 내정, 2) 외교, 3) 무력준비, 4) 경제문제의 네 가지 사항에 관한 李承晩의 지도를 요망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이상룡의 조각작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상룡을 추대하여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려고 했던 개조파그룹은 낭패했다. ..................................................................................................................... 孫世一의 비교 評傳 (4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內務總長 사임 2년 만에 國務領으로 선출되다 東亞日報 1930. 2.13 韓族總聯合會 主催 金佐鎭이 滿洲 寧安縣 山市驛前에서 共産主義者 金一星의 사주를 받은 朴尙實에 의하여 暗殺당하다. 1898.3.10. 종로 네거리 萬民共同會 연사 총대 이승만 [ .... 연사들은 대한이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고문관의 철수를 역설했다 ....... 李承晩, 현공렴, 張鵬(장붕) 세 사람을 총대위원(대표)으로 선출하여 ...... ] . [ .... 러시아 정부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통보 ....... ] [ .... 독립협회의 대중운동의 향도 역할을 ........ ] (1) 첫 萬民共同會의 연사와 총대위원 1898년 3월10일 오후 2시에 종로 네거리에서 이 나라 최초의 근대적 大衆集會가 열렸다. 이날짜 「독립신문」은 〈오늘 오후 두 시에 종로에서 유명한 유지각한 이들이 좋은 연설을 한다고 뜻있는 군자들을 청하였다더라〉는 예고기사를 싣고 있다. 이 집회는 徐載弼, 李完用, 尹致昊 등 독립협회 간부들이 은밀히 준비한 것이었는데,1) 미국 생활의 경험이 있는 이들은 미국 대중집회의 격식과 효과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날의 집회에 독립협회 간부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培材學堂과 京城學堂의 젊은 교사와 學員들을 연사로 내세우기로 했다. 李承晩은 玄公廉(현공렴), 洪正厚(홍정후) 등과 함께 이 역사적인 대중집회의 연사로 선정되었다. 李承晩과 홍정후는 배재학당 대표였고, 현공렴은 경성학당 대표였다. 현공렴은 開化派 史學者 玄采(현채)의 아들로서 일본에 유학한 뒤에 경성학당에 다니면서 光武協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을 맡고 있었다. 협성회 간부 李承晩이 독립협회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집회에는 주최 쪽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독립신문」과 鄭喬(정교)는 이날 모인 군중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했고,2) 집회를 참관한 외국 사람들도 8000명에 가까운 인파로 추산했다.3)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이 모인 것이었다. 백목전 다락 위에서 연설 집회는 먼저 米廛(미전)의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했는데, 그것은 일반대중의 참여를 과시하기 위한 배려에서였을 것이다. 연사들은 白木廛(백목전) 다락 위에서 연설을 했다. 집회의 목적은 외교 현안인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키자는 여론을 조성하고, 이 집회의 이름으로 그러한 주장을 담은 메시지(편지)를 정부에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연사들은 대한이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고문관의 철수를 역설했다.4) 청중들은 박수로서 『옳소(可)』라고 하면서 〈사람마다 대한이 자주 독립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표시했다.5) 이어 대회는 외부대신에게 보내는 회중의 일치된 뜻을 밝힌 편지를 채택하고 李承晩, 현공렴, 張鵬(장붕) 세 사람을 총대위원(대표)으로 선출하여 그들의 이름으로 이 편지를 외부에 전달하도록 했다. 대회는 큰 성공이었다. 독립협회가 이 집회를 계획할 때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이 「民會」라고만 했었으나, 모인 사람들이 1만여 명이 되었다고 하여 이날 이후로는 대중집회를 가리켜 「萬民共同會」라고 일컫게 되었다. 이날의 집회는 질서정연했고 연사들의 연설 기조도 침착했다.6) 그리고 외국인들도 많이 참관했는데, 개중에는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Alexis de Speyer)도 공사관원들과 함께 그 자리에 나와 있었고,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등 미국인들도 와서 지켜보았다. 이날의 집회는 정부와 서울의 외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독립협회의 간부들은 대회가 질서정연하게 진행된 것에 만족했다.7) 외부대신 閔種默(민종묵)은 이튿날 세 총대위원 앞으로 〈공동한 의론을 알았으며 러시아 고문관과 사관을 보낼 일은 탁지부와 군부의 소관이요 또한 정부에서 어떻게 의판하기를 기다릴 것이라〉는 답장을 보냈다.8) 李承晩은 이 답장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12일에 종로 네거리에 나가 붙였다. 그런데 이날 이틀 전에 만민공동회가 열렸던 자리에 독립협회와는 관계없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리고 있었다. 남촌 사는 사람들이 나서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때와 같은 취지의 연설을 했고, 또 북도 사람 네 명과 시위대 사관 두 명이 반대연설을 하려다가 시민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9) 러시아人 財政顧問과 軍事敎官 철수 1898년은 독립협회의 自主民權運動이 절정을 이룬 해였다. 독립협회는 朝鮮이 淸國으로부터 獨立한 것을 기념하여 迎恩門 자리에 獨立門을 세우고 그 주변에 獨立公園을 조성할 것을 사업목적으로 하여 1896년 7월2일에 결성된 사업단체였으나, 실제로는 徐載弼 등 개화파들이 처음부터 이 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을 목표로 하여 결성한 政治結社였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계몽적인 講演會에 이어 1897년 8월29일부터는 배재학당의 協成會와 같은 토론회를 정례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정치결사로서의 협회의 역량을 배양할 뿐만 아니라 자주민권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급속히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1898년에 접어들어서는 上疏(상소)와 정부 각부에 보내는 편지와 萬民共同會라는 대중집회를 통하여 열강의 이권침탈 저지와 의회설립 요구 등의 運動을 강력히 전개했다. 3월10일의 만민공동회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협회의 회원수도 급속히 늘어났고, 公州, 平壤, 大邱, 宣川, 義州, 木浦, 仁川 등 각지에 지회가 설립되었다.10) 정부는 독립협회의 주장대로 3월12일에 러시아에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요구했고, 17일에는 러시아 정부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통보해 왔다.11) 뿐만 아니라 절영도 석탄기지 租借(조차) 요구도 철회하고, 3월1일에 설립한 한러은행도 철폐했다. 독립협회는 승리감에 넘쳤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치는 때마침 러시아의 극동정책이 한국문제보다도 만주문제에 「모험적 진출」을 도모하던 때였기 때문이었는데,12) 이러한 기묘한 사정이 독립협회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 徐載弼의 재출국 막기 위한 萬民共同會 주도 3월10일의 만민공동회 이후로 독립협회의 소장파 활동가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 李承晩은 「매일신문」을 펴내는 데 열중하면서도 독립협회의 대중운동의 향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4월30일에 崇禮門(숭례문 남대문) 안에서 열린 서재필의 在留(재유)를 요청하는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회장 尹致昊의 동의도 받지 않고 열린 것이었는데, 李承晩은 이 대회에서도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그 동안 독립협회가 대중적 기반을 확대해 가면서 자주독립을 강조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며 고급관료들의 무능과 부패를 고발하는 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자, 친러 수구파 정부와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은 서재필을 해고하여 추방함으로써 독립협회의 활동을 저지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재정고문과 교련사관이 해고되어 출국하게 되자 정부는 외국인고문 해고를 빙자하여 4월에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하고 출국을 요청했다. 독립협회는 4월25일에 그러한 조치는 부당한 일이라고 극력 반대하면서 서재필의 再雇騁(재고빙)을 요청하는 편지를 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정부는 사흘 뒤인 4월28일에 〈서재필은 이미 해고되었으므로 在留 여부는 본인의 의사에 달린 것〉이라고 사실상 거절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 숭례문 안 만민공동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이날의 만민공동회는 정부에 서재필의 재고빙을 요청하는 편지를 다시 보냄과 동시에 서재필에게도 재유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李承晩과 함께 崔廷植(최정식)과 鄭恒謨(정항모)를 총대위원으로 선출했다. .................................................................................................................................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204100063&ctcd=&cpage=1 2002년 4월호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 박사가 홀홀단신으로, 그놈들과 마자싸와, 死生을 직결하던, 그의 극적 활약장면은, 아아 무엇이라 말삼하면 可하오릿가. ........ ] 李承晩 博士는 渾身都是熱 金一善 이러케 鐘路를 거처서 청년회관을 오면 李박사 생각이 別로 간졀해짐니다. 정말로 公번 띄고 私心업고, 혼신이 도모지 열정 떵어리인 李박사! 그야말로 愛國愛民의 열렬한 志士요 烈士임니다. 일즉이 海州에서 생장하야, 자기 아버지를 쪼차 京城에 드러오기는 아마 16,7세이엿슬 듯함니다. 본래 漢文에 능한 그는 培材學堂에 드러가 영어를 중심으로 신학문을 학습하다가, 丁酉年頃에 徐載弼박사가 독립신문을 發刋할때에는 그 社에 논설기자로 드러가서, 독립이상의 고취에 盡力하얏슴니다. 독립협회라 하며, 만민공동회라 하면 더 말할 것 업시 近世의 조선에서 처음 닐어난 유일한 민간정당으로서, 당시에 宮中府中을 蕭淸하고, 민간사회를 혁신하기에 얼마마한 활약을 하엿는가하는 것은 이제 군더덕이로 말할 것 까지도 업는 바이어니와, 李박사는 그때 겨우 22,3세의 年少로써, 일즉히 독립협회에 관계하고 만민공동회를 지도하야, 소위 황국협회의 褓負商軍으로 더부러 정면격투를 행하얏슴니다. (戊戌己亥年間의 일), 그 당시에 내가 아조 實見한 광경이 잇거이와, 兵丁, 난민을 어울너서 수천으로써 算하는 平凉子軍(褓負商)이 제각각 흉기를 들고, 새문 밧그로부터 貞洞을 넘어, 大漢門쪽 길로 덥허올 때에, 박사가 홀홀단신으로, 그놈들과 마자싸와, 死生을 직결하던, 그의 극적 활약장면은, 아아 무엇이라 말삼하면 可하오릿가. 엇잿던 박사는 그와가티 열렬하엿스며 대담하엿슴니다. ................................................................................................................................... 개벽 제62호 밧게 잇는 이 생각, 異域風霜에 氣軆安寧하신가 1925년 08월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