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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용 1945.10. [ ....... '소련' 공산당원 생활을 계속 ....... ..... 10월 10일에도 그들은 '소련' 공산당원으로서 '소련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와 그 지령을 충실히 집행 ...... 김일성은 북조선 공산당의 당수가 되고 그 일파는 북조선공산당의 당간부가 ....... ...... 3중당경력자 ...... 2중당적을 가지고 2중당생활을 계속 ....... ..... 당세포원으로서 '소련공산당' 현지당조직의 각종 당회의에도 참석하고 북조선공산당회의에도 참석 ....... 장군복을 입은 상급당간부들의 지령을 받아 가지고 나와서 조선공산당측의 당회의에서는 최고간부로서 '볼세비키' 당회의의 결정 또는 그 지령을 내려먹이는 것 ....... ] 1962.6.15. 동아일보 김일성을 고발한다 김일성 직속기자의 수기 38 한재덕 10월 10일 소련군사령부의 알선하에 그러나 비밀집회마냥 남몰래 열린 공산간부들의 회합에서 김일성이 괴뢰괴수로 뽑힌것은 선거가 아니라 소련 상전에 의한 조직적 '임명'이었다. 다른 김일성 일파의 간부 취임도 그러하였다. 사실 이때에 있어서는 김일성 일파를 국내파와 대비해본다면 수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실력에 있어서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때 대회에 나타난 김일성 일파의 최고 간부라는 것이 김책 안길 김일 최현 임춘추 등이었는데 그실 그들은 이론은 별문제로 하고 '말' 자체도 변변치 못한자들로서 모두 한데 묶어도 오기섭 하나를 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붉은 군대 장군복을 입은 '볼세비키'들이 그들을 밀었다. 이것은 절대적이었다. 그리하여 김일성 일파가 당의 실권을 쥐게 된 것이다. 사실 이렇게 조작된 '북조선 공산당'이란 '김일성당'인 동시에 실질적으로는 '소련 볼세비키' 공산당의 '북조선지부' (지구당)에 불과한 것이었다. 특히 이때 북한공산당의 실권을 쥔 김일성과 그 일파는 아직도 명실 공히 '소련' 공산당원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김일성 일파는 앞서도 간단히 지적한 바 있었지만 '소련'에 들어가 특수훈련을 받을 때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여 그 당생활을 하다가 '소련' 공산당원으로서 북한에 들어와서 역시 '소련' 공산당원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이때 10월 10일에도 그들은 '소련' 공산당원으로서 '소련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와 그 지령을 충실히 집행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일성은 북조선 공산당의 당수가 되고 그 일파는 북조선공산당의 당간부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 시작하여 '소련' 공산당원을 거쳐 조선공산당원이 된 3중당경력자이다. 이것은 국제공산진영에서도 드문 일이다. 오늘 중소간에서 갈팡질팡하는 김일성의 태도는 이 당력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해서 김일성 일파는 이떄로부터 2중당적을 가지고 2중당생활을 계속하였다. 이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조직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요, 당적 협잡이었다. 그런데 더욱 엄중한 사실은 그들은 그 이후에 있어서도 상당한 시일을 두고 이 2중당생활을 계속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주둔군대내 당세포원으로서 '소련공산당' 현지당조직의 각종 당회의에도 참석하고 북조선공산당회의에도 참석하였다. 물론 전자의 '소련공산당' 측의 당회의에서는 하급간부로서 장군복을 입은 상급당간부들의 지령을 받아 가지고 나와서 조선공산당측의 당회의에서는 최고간부로서 '볼세비키' 당회의의 결정 또는 그 지령을 내려먹이는 것이었다. 이 경우 김일성 일당은 '소련공산당'의 '프락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북조선지구당'에 파견된 당본부간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에서 '소련공산당'의 의사와 지령은 김일성 일당을 통하여 이렇게 수행되었고 관철되었다. 이것은 '괴뢰'라기에는 너무나 직접적인 것이었다. 당적 문제뿐 아니라 국적 문제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들은 2중당적자인 동시에 2중국적자자였던 것이다. 이것이 언제까지 이대로 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1948년부터 근3년간 북한 '중앙통신사'에서 '보도부장'으로서 또는 '주필'로서 일을 보았는데 이때 사장이 이문일이라는 아주 인색한 '소련' 2세였다. 그는 '조선노동당' 당증도 가지고 당비도 매달 납입하면서 번번이 '당비도 두몫을 내려니까 헐치 않은데....' 하고 투덜대기도 하고 재기도 하는 꼴을 나는 직접 몇번이나 본 일이 있다. 그런데 훨씬 후인 1957년 12월 16에 이르러 '조소 양국간의 2중국적자의 공민권조절에 관한 조약'이 조인되었다 하여 ' 이 협약은 조선과 소련의 공민권을 가지고 있는 2중국적자에게 '조소' 쌍방중 1방의 공민권을 자원적으로 부여하였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이것은 김일성을 비롯하여 '소련'서 나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때까지 그실 '소련' 공민이었다는 것을 더욱 뚜렷하게 알게 해주는 것이며 이때에 있어서도 원한다면 '소련' 사람으로 그냥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2중당적문제에 대하여는 언제 어떻게 타협이 되었는지조차 발표된일이 없다. 물론 발표할 성질의 것도 못 될 것이다. 이것은 실로 엄중한 사실이다. 실로 김일성은 '소련공산당원'이면서 북조선공산당 당수가 되었으며 '소련' 공민이면서 북괴 '수상'이 된 것이다. 세상에 이런 국제적 협잡이 어디 있을 것이며 민족적 반역이 어디 있을 것인가? 북한 초대내각은 스탈린과 소련군이 짠 것 이승만이 초대 내각 구성할 때 트루먼한테 보고하고 했나? 金學俊 (前 동아일보 회장) < 북한에서 처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相과 副相, 즉 장관과 차관을 임명하잖습니까? 그 임명하는 과정도 소련 문서에 그대로 나왔어요. 평양에 있는 소련점령군 사령부가 명단을 만들었어요. 相, 副相 다 만들어서 김일성이를 불러서 맞춰봅니다. 이렇게 하자, 그래도 김일성이 한 두 사람 더 추천하더라고요, 그러나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것을 모스크바에 보고해요. 그것을 스탈린이 봅니다. 봐서, 그래? 이렇게 했어? 아 그래 좋아 그렇게 해. 그래서 발표된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내각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처음 초대 내각을 구성해서 발표할 때, 트루만이 그 명단을 봤다든가, 美 국무장관이 봤다던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國內에서 일부 세력은 “대한민국은 무슨 美帝가 만들어 낸 나라고 자주성이 없는 나라인데, 북한은 자주성이 있는 나라이다.” 이런 말이 어떻게 나옵니까 ? > ,,,,,,,,,,,,,,,,,,,,,,,,,,,,,,,,,,,,,,,,,,,,,,,,,,,,,,,,,,,,,,,, ▲대한민국 초대 내각 독립운동가 *대통령-이승만(李承晩,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이시영(李始榮, 임정내무총장) *국무총리*국방장관-이범석(李範奭, 광복군 참모장) *국회의장-신익희(申翼熙, 임정내무총장) *대법원장-김병로(金炳魯, 항일변호사) *무임소장관-이윤영(李允榮, 국내항일) *무임소 장관-이청천(李靑天*광복군 총사령관) *외무장관-장택상(張澤相, 청구구락부사건) *내무장관-윤치영(尹致映, 홍업구락부사건) *법무장관-이 인(李 仁, 항일변호사, 한글학회사건) *재무장관-김도연(金度演, 2.8독립사건) *상공장관-임영신(任永信, 독립운동가-교육가) *문교장관-안호상(安浩相, 항일교육) *사회장관-전진한(錢鎭漢, 국내항일) *체신장관-윤석구(尹錫龜, 국내항일, 6.25전쟁 중 인민군에게 총살) *교통장관-민희식(閔熙植, 재미항일) *총무처장-김병연(국내항일) *기획처장-이순탁(국내항일) *공보처장-김동성(국내항일) ▲북한 김일성 내각의 친일파 *김영주-북한 부주석, 당시 서열 2위, 김일성 동생 (일제시대 헌병 보조원) *장헌근-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시대 중추원 참의) *강양욱-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일제시대 도의원) *정국은-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김정제-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시대 양주군수) *조일명-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북한 부수상 (일제시대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 활-북한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허민국-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시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강치우-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시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김달삼-조선로동당 4.3사건 주동자 (일제시대 소위) *박팔양-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일제시대 만선일보 편집부장) *한낙규-북한 김일성대 교수 (일제시대 검찰총장) *정준택-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시대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 *한희진-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시대 함흥철도 국장) *이승엽-남조선 로동당 서열 2위, 월북 후 빨치산 유격투쟁 지도 (일제시대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 국민상식/李承晩 정부는 독립투사 정부, 金日成 정부는 非命橫死 정부 1.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초대 내각 명단을 보자. 수상 金日成, 부수상(외무상 겸임) 朴憲永(처형), 부수상(산업상 겸임) 金策, 부수상 洪命熹, 내무상 朴一禹(숙청), 민족보위상 崔庸健, 재정상 崔昌益(처형), 사법상 李承燁(처형), 상업상 張時雨(처형), 교통상 朱寧夏(처형), 노동상 許成澤(처형), 국가검열상 金元鳳, 도시 경영상 李鏞, 교육상 白南雲, 문화선전상 許貞淑, 농림상 朴文圭, 보건상 李炳南, 보위성부상 김무정(처형), 최고회의 의장許憲, 최고회의 상임위원장 金枓奉(숙청). 이상 20명 중 10명이 사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라졌다. 非命橫死 내각인 셈이다. 2.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본다. 대통령 李承晩(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李始榮(임시정부 재무총장), 국회의장 申翼熙(임시정부 내무총장), 대법원장 金炳魯(抗日변호사), 국무총리 李範奭(광복군 참모장), 외무장관 張澤相(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내무장관 尹致暎(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재무장관 金度演(2·8독립선언 투옥), 법부장관 李仁(抗日 변호사), 국방장관 李範奭 겸임, 문교장관 安浩相(철학교수), 농림장관 曺奉岩(공산당 간부·사형), 상공장관 任永信(독립운동, 교육가), 사회장관 錢鎭漢(抗日 노동운동가), 교통장관 閔熙植(철도교통 전문가), 체신장관 尹錫龜(교육 사회운동가), 무임소 장관 李靑天(광복군 총사령관), 무임소 장관 李允榮(抗日 기독교 목사), 국회부의장 金東元(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 국회부의장 金若水(사회주의 독립운동). 이상 19명은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다. 친일파는 한 사람도 없다. 反共反日을 國是로 삼다시피한 李承晩 대통령이 親日한 사람을 장관으로 기용할 리가 없었다. 다만, 親日 경찰 출신들을 중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수사하도록 했는데, 이들이 정치사찰까지 하는 바람에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조사하는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대체로 李承晩 내각은 독립투사 내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북한 어느 쪽이 정통성이 있느냐가 自明하게 판명된다. 정통성 안에는 法治의 요소가 크게 자리잡아야 한다. 정치적 숙청으로써 초대 각료의 반을 제거하는 체제에 정통성이 있을 수 없다. .......................................................................... [ 2011-07-19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9415&C_CC=AC [ ......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이미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낙점 ....... ...... 심사 결과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추천 .... 추천서를 받은 베리야는 “좋다”고 평가한 뒤 다시 스탈린에게 보고 ........ ]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 <1부> ⑤ 김일성은 소련군의 심사를 받았다 [ 동아일보 2004-09-13 ] 《 9일은 북한정권 수립 56주년. 관영 러시아방송은 8일 특집방송에서 남북분단과 6·25전쟁에 대한 오래된 논란을 정리하는 결정적 비화 하나를 전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이미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낙점했고, 김일성이 반대하는 스탈린을 설득해 남침을 감행했다는 것이다(본보 10일자 A2면 보도). 광복 후 49년 동안이나 북한을 지배하고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한 김일성은 누구인가. 해방공간에서 우익은 ‘스탈린이 키워낸 소련점령군의 앞잡이’로 보았으나, 좌익은 ‘항일빨치산을 이끌어 온 민족적 영웅’으로 치켜세운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료를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쫓아보자. 》 ............................................................................ ● 연해주에서 소련군에 구금된 김일성 1939년부터 일제 관동군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자 김일성은 이듬해 10월 부하 5명을 데리고 연해주로 들어갔다. 이때 그는 부하였던 김정숙과 결혼했다. 연해주에 함께 간 이을설 전문섭 강위룡 이두익 등은 나중에 북한 군부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소련 극동군은 김일성 일행을 구금했다. 코민테른의 허가 없이 소련에 들어왔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운 좋게 풀려났다. 동북항일연군 시절의 상관이자 코민테른 허가를 받고 먼저 소련에 들어온 저우바오중(周保中)이 신원을 보증했기 때문이다. 소련 극동군은 그들을 산하의 88국제여단에 편입시키고, 김일성을 1대대장으로 임명했다. 88국제여단은 정규경찰과 비밀경찰 및 국경수비대를 관할하던 내무인민위원부 산하여서 악명 높은 라브렌티 베리야 장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 부여받았던 대위 계급은 군이 아니라 경찰계급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실제로 내무인민위원부는 군을 관할하던 인민무력위원부와 똑같은 계급과 계급장을 썼다. ● 러시아에 남아 있는 ‘김일성 심사기록’ 이 무렵 소련은 일본과 중립불가침조약을 맺어 조선인이든 중국인이든 소련군 산하 빨치산들의 항일투쟁엔 제동이 걸렸다. 김일성 일행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소일한 시기였다. 소련이 일본과의 중립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결심한 1945년 4월 이후에야 상황이 바뀌었다. 조선인 전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도 그들에게 참전을 명하지 않고 계속 연해주에 머물러 있도록 했다. 따라서 부하들을 이끌고 대일전에 참전해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개선장군으로 귀국했다는 김일성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소련이 김일성을 찾은 것은 소련군이 평양에 사령부를 개설한 뒤였다. 그해 8월 하순과 9월 초순 사이에 스탈린이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데르 바실리예프스키 원수에게 “북조선을 소련의 뜻에 맞게 이끌 조선인 지도자를 추천해 보고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소련 극동군이 김일성 심사에 나선 것이다. 러시아 국방부에는 지금도 그 심사기록이 남아 있다. ● 스탈린, 비공개리에 직접 김일성 면접 “당신은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길 원하는가?” “예,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북조선으로 일하러 가라고 제안한다면?” “세계혁명과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면 항상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대답이오.” 심사기록에 나와 있는 소련 극동군 관계자와 김일성의 대화록이다. 심사 결과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추천했다. 추천서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에 대한 교육을 꾸준히 받고 있음.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음”이라는 평가가 붙어 있다. 추천서를 받은 베리야는 “좋다”고 평가한 뒤 다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스탈린의 번견(番犬)으로 무고한 시민들의 투옥과 고문에 앞장서 공포정치의 상징이 된 베리야는 이후에도 줄곧 김일성의 옹호자가 된다.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의 정보 및 정치공작 담당 과장이던 그리고리 메클레르 예비역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베리야의 보고서를 읽은 직후 김일성을 비공개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면접을 했다. 이에 김일성이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예, 예”를 연발하자 스탈린은 흡족해했다는 것이다. ● 김일성은 결코 개선한 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서 88국제여단 1대대 부하들과 함께 소련 군함인 푸가초프호를 타고 추석 전날 귀국했다. 소련 극동군 산하 제25군이 평양에 주둔군 사령부를 개설한 1945년 8월 26일로부터 24일이 지난 9월 19일 원산에 도착한 것이다. 조선을 떠난 지 20년 8개월 만이었다. 김일성이 열차 편으로 평양에 도착한 것은 9월 22일. 그는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결코 개선이 아니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스탈린의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돌아온 것일 뿐이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40912/8105836/1 1945.8.24. 저우바오중 [ ...... 제88 정찰여단은 1942년 6월 스탈린 동지의 직접 지시에 따라 창설됐습니다. ....... ...... (여단은) 이들 지역에서 군사·정치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 ] " 소련이 김일성 키운 건 1942년부터 " 유석재 기자 2008.07.01 김국후씨 군사 보고서 공개 김일성이 광복 3년 전부터 소련군에 의해 체계적인 정치·군사지도자 교육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조선대 정책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낸 김국후(金局厚·62)씨는 최근 출간된 연구서 《비록(秘錄) 평양의 소련군정》(한울아카데미)을 통해 당시의 중요 군사 보고서를 공개했다. 소련군이 북한 전역을 점령한 상황이었던 1945년 8월 24일, 소련 제2 극동전선군 제88 정찰여단장인 중국인 저우바오중(周保中) 대좌는 소련 극동군 바실레프스키 총사령관에게 긴급 보고서를 보냈다. "제게 위임된 " 소련이 김일성 키운 건 1942년부터 " 유석재 기자 2008.07.01 김국후씨 군사 보고서 공개 김일성이 광복 3년 전부터 소련군에 의해 체계적인 정치·군사지도자 교육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조선대 정책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낸 김국후(金局厚·62)씨는 최근 출간된 연구서 《비록(秘錄) 평양의 소련군정》(한울아카데미)을 통해 당시의 중요 군사 보고서를 공개했다. 소련군이 북한 전역을 점령한 상황이었던 1945년 8월 24일, 소련 제2 극동전선군 제88 정찰여단장인 중국인 저우바오중(周保中) 대좌는 소련 극동군 바실레프스키 총사령관에게 긴급 보고서를 보냈다. "제게 위임된 제88 정찰여단은 1942년 6월 스탈린 동지의 직접 지시에 따라 창설됐습니다. 중국 동지들 대부분은 …만주에서 일본 강점자들에 맞서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지도자들입니다. (여단은) 이들 지역에서 군사·정치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김씨는 소련 국방성 중앙고문서 보관소에서 발견한 이 비밀문서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제88 정찰여단이야말로 김일성(金日成)이 일제 말기 3년 동안 근무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김 전 교수는 평양주둔 소련군정 고위정치장교와 구 소련 망명 북한 군·정 고위인사와의 인터뷰, 소련 국방성, 소련 공산당중앙위원회의 비밀문서 등을 분석했다. 저우바오중이 지목한 '중국 동지'들 중에는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원으로서 빨치산 활동을 했던 김일성 부대 80여 명도 포함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이 이미 1942년부터 극동 지역에서 위성 국가를 세우기 위해 군사·정치 지도자를 양성했던 것이며, 김일성은 이미 이때부터 소련에 의해 지도자로 키워지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보고서는 또 "대일(對日) 전투작전이 개시된 지 4일 후 여단의 작전 계획이 전면 취소됐고 현재까지 여단을 이용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제88 정찰여단이 소련군의 대일전에서 총 한 방 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김씨는 설명했다.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30/2008063001742.html [ ...... Stalin .... asked Lavrenty Beria to recommend possible candidates. Beria met Kim several times before recommending him to Stalin. ........ ] Kim Il-sung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 Stalin realized he needed someone to head a puppet regime. He asked Lavrenty Beria to recommend possible candidates. Beria met Kim several times before recommending him to Stalin. It is widely believed that Kim was selected over several more qualified candidates because he had no ties to the native Communist movement.[11] Kim arrived in North Korea on 22 August after 26 years in exile. According to Leonid Vassin, an officer with the Soviet MVD, Kim was essentially "created from zero." For one, his Korean was marginal at best; he'd only had eight years of formal education, all of it in Chinese. He needed considerable coaching to read a speech the MVD prepared for him at a Communist Party congress three days after he arrived. They also systematically destroyed most of the true leaders of the resistance who ended up north of the 38th parallel.[11] ............................................................................................................. [ .... 소련국가안전위원회(KGB) 원동방면 책임자인 솔로킨 소장의 비밀정보원이자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은 원동방면군 사령관 부르가예프 대장과 솔로킨 소장의 추천으로 스탈린에 의해 북조선의 수령감으로 지목 ...... ] [ ..... 모스크바에 두번 갔는데 그것은 솔로킨 소장이 소련 수뇌부에 김장군을 추천했기 때문 ...... ] 1990.4.22. 동아일보 비화 김일성과 북한 전 북한군 사단 정치위원 수기 <1> 김은 소 KGB 정보원이었다. 동아일보 1990.4.22. 비화 김일성과 북한 전 북한군 사단 정치위원 수기 <1> 김은 소 KGB 정보원이었다. 항일 유격대 시절 대원 고작 20여명 지휘 평양 입성 연설문 소장군이 써준 것 읽어 덧니 많아 모두 뽑고 틀니로 ... 최현이 김정숙과 결혼 중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다. 그러나 김일성 개인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북한 정권 45년의 역사는 북한 당국의 미화작업에 의해 혹은 과거 우리정부의 굴절된 시각에 의해 진실에의 접근이 차단돼 왔다. 본보는 초기 북한 역사의 실체에 접근하여 오늘의 북한을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돼 줄 전북한군 보병사단 정치위원 여정의 회고록을 연재한다. 여정은 45년에서 50년까지 중국인민군의 일원으로 만주에서 일본군의 패잔병과 싸웠으며 50년초 귀국, 6.25 때는 북한군 보병연대 당위원장으로 참전했다. 여정은 종전 후 여러 차례 무공훈장을 받고 승진을 거듭했으나 1959년 군부내 연안파 출신 간부숙청 때 반당 종파분자로 몰려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는 만기 출감한 뒤 북한을 탈출 현재 중국에 살고 있다. ................................................................ 신변 안전을 염려한 그의 요청에 따라 그의 이름은 가명으로 했음을 밝혀둔다. ......................................................................... ............................................................................................................. 소련국가안전위원회(KGB) 원동방면 책임자인 솔로킨 소장의 비밀정보원이자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은 원동방면군 사령관 부르가예프 대장과 솔로킨 소장의 추천으로 스탈린에 의해 북조선의 수령감으로 지목됐던 것이다. .................................................................................................... 내가 회고록 첫머리에 이들의 증언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역사의 진실과 함께 소련이 김일성을 선택하게 된 진짜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다. 만일 소련이 김일성을 지목하지 않았더라면 북조선은 오늘날과 같은 파탄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 최원 (소장 총참모부 군사과학국장)의 증언 (최원은 본래 소련군 상위로서 원동사령부 솔로킨 소장 밑에서 정보사업을 했었다.) " 소련 원동방면군 사령부에서는 중국만주 항일연군 사람을 믿지 않았지요. 사령관 부르가예프 대장이나 솔로킨 소장도 그랬소. 솔로킨 소장은 베리야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고 소련 국가안전위원회의 원동방면책임자였는데 자주 항일연군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김일성은 믿을 수 있는 우리 사람이라고 합디다. 솔로킨은 88여단의 내부 상황을 김 장군을 통해 손금 보듯 파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솔로킨 소장이 김장군을 우리 사람이라고 한 것은 국가안전위원회 사람이란는 뜻이지요. 김 장군이 88여단에 있을 때 모스크바에 두번 갔는데 그것은 솔로킨 소장이 소련 수뇌부에 김장군을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 나움 소르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나움 세묘노비치 소르킨(러시아어: Наум Семёнович Соркин, Naum Semyonovich Sorkin, 1899년 2월 11일~1980년 1월 16일)[1]은 소련의 군인이자 외교관이다. 1940년대에 소련 극동전선군의 정찰국장이었으며, 만주서 넘어온 동북항일연군의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수용한 제88국제여단의 창설부터 운영 및 해체까지 직접 관장하였다. 제1영장 김일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스탈린이 그를 북한 지도자로 발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왕신림(王新林)이란 중국식 암호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생애 ............................................................... 이후 소련군에 근무하다 1941년 3월 하바롭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фронт)으로 부임했으며, 1944년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1~1945년 기간에 극동전선군의 정찰국장을 지냈다.[1] 극동 부임 초기에 왕신림(王新林)이란 중국식 암호명으로 만주의 동북항일연군 인사들과 접촉하며 그들의 소련 망명과 수용문제를 다루어 타결지었다. 이들을 우선 하바롭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북야영과 보로실로프 인근 하마탄(현재의 라즈돌노예) 마을의 남야영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가 1942년 7월 뱌츠코예의 북야영에 남, 북야영 인원 모두를 수용한 제88국제여단을 창설하고, 부대 운영을 직접 관장한다. 88여단장에는 중국인 주보중(周保中, 1902~1964) 중령, 제1대대의 대대장에는 김일성 대위가 임명된다.[2][3] 소르킨은 내무인민위원회 위원 라브렌티 베리야의 심복으로 알려져 있으며, 1945년 8월 대일본전이 끝난 후 스탈린이 북한 지도자을 물색할 때에 그가 김일성을 극동군 사령부와 베리야에게 추천한 것으로 파악된다.[4][3]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고, 88여단의 인원들이 중국과 북한으로 귀환하게되자 부대를 해체하는 일도 그가 맡았다. ........................................................................................ [ ..... 김일성이 너 좀 와라하면, 김일성이 비행기 타고 갑니다. ........ ....... 누가 나와서 선동연설을 하면, 누가 박수를 치고, 그 시나리오까지 다 사령관 손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소련사령관은 그것을 보고 논평을 ......... ] 스티코프가 김일성을 下人처럼 다뤘다 金學俊 박사 강연에서 스티코프가 하바로프스크에 앉아서 김일성이 너 좀 와라하면, 김일성이 비행기 타고 갑니다. “그 사이 어떻게 됐어, 토지개혁은 어떻게 진행 됐나”, “아 그거 안 되겠어.”, 이렇게 해“ 그게 다 문서에 나와요. 조갑제닷컴 소련군 연해주軍官區 실력자 스티코프가 하바로프스크에 앉아서 김일성이 너 좀 와라하면, 김일성이 비행기 타고 갑니다. “그 사이 어떻게 됐어, 토지개혁은 어떻게 진행 됐나”, “아 그거 안 되겠어.”, 이렇게 해“ 그게 다 문서에 나와요. 심지어 1946, 47년에 북한에서는 선거가 실시되잖습니까 그때마다 스티코프가 직접 평양에 오고, 진남포, 해주까지 다 시찰합니다. 시찰하면서, 여기 선거현수막 이거 바꿔, 이거 가지고 안돼, 심지어 김일성의 연설문을 자기가 고쳐 써줘요, 고쳐 써준 것을 김일성이 읽은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자율성이 있습니까 이것을 모르고 그 때 북한은 자율성이 있었는데, 남한은 자율성이 없었고 ― 이건 그러한 原자료들을 보지 않은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제가 더 놀라웠던 것은, 공산통치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더라고요. 황해도 해주에서 무슨 회의가 열렸어요. 그런데 그 회의를 할 때의 회의 계획서, 이것까지 다 북한점령군 사령관에게 보고하더라고요. 국기 경례, 스탈린 대원수에 대한 인사, 그것까지 다 써 있어요. 누가 나와서 선동연설을 하면, 누가 박수를 치고, 그 시나리오까지 다 사령관 손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소련사령관은 그것을 보고 논평을 해요. 미군이 남한을 통치하는 동안에 미국의 백악관이나 미국의 본국 정부나 미국의 펜타곤에서 서울의 韓人들에게 韓人들이 지방에서 개최하는 회의에 대해 사전에 보고하고 검열을 받도록 지시를 했다는 것이 지금 문서로 나온 게 없습니다. 소련은 그만큼 철저하게 북한을 장악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건 뭘 말하느냐, 그때 북한은 우리가 배워왔던 그대로 소련의 위성국가였고, 자율성을 가진 나라가 아니었다, 이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 (前 동아일보 회장 金學俊 박사 강연에서) [ 2011-07-19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9414&C_CC=AC [김용삼 칼럼] 북한의 ‘건국’에 대해 알아보자 2018.08.20 .......................................................................................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 ‘건국’이 문제란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건국일이 아니라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민중의 열망을 무시하고 미제의 힘을 끌어들여 분단정권을 출범시킨 몹쓸 날이란다. 따라서 ‘건국’은 1919년 중국 땅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한 날이 되어야 한다고 이 나라의 대통령까지 나서서 선언을 해버렸다. 제 나라 건국일에는 침을 뱉는 인간들이 북한 정부가 출범한 1948년 9월 9일은 ‘건국절’이라고 정중하게 예우한다. 반제 반봉건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혁명적 열기를 수렴하여 식민 잔재와 봉건 잔재를 척결하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성공했으니까 예우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 정해구․최장집은 1989년 한길사가 펴낸 『해방전후사의 인식』제4권에 게재한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이란 논문에서 해방공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이 실패하여 반혁명으로 귀결된 데 비해 북한에서의 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민중들의 혁명열기가 소련군의 후원이라는 유리한 조건 속에서 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이란 공산화를 말하는데 남한에서는 그것이 실패했고,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후원을 얻어 공산화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193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이 정립한 민족·민주혁명 이론은, 나라에 따라 신민주주의혁명이나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것을 실천한 모든 나라에서 예외 없이 실패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비난·거부·부인하는 좌익·전체주의 신봉세력들의 난동에 혈압을 높이기에 앞서, 그들이 그토록 경하해 마지않는 38선 북쪽에 공산정권을 수립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진짜 건국 과정을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통해 해부해 보기로 한다. ..................................................................... 대한민국은 유엔의 자손, 북한은 스탈린의 자손 그렇다면 북한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건국되었나? 우선 북한에도 우리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조직을 위해 복잡한 다단계 작업에 착수했다. 그 작업과정을 도식화하면 아래 표와 같이 정리되는데, 모든 과정이 소련군정의 철저한 기획과 연출, 감시와 협박, 조종과 인큐베이팅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을 예의주시하기 바란다. 소련군정 지도부는 북한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의 수립에서부터 실행계획과 대회진행 및 의사일정, 심지어 대의원(국회의원)의 정당별 의석 배분, 출신성분별 구성 인원과 숫자까지 세세하게 결정하여 이를 지령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대한민국의 제헌의원 선거 과정에서 미군정이 선거를 실시하기 전에 정당별로 의석을 배분하고, 출신 성분별로 인원을 정해놓은 다음, 그에 맞춰 당선자를 결정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북한은 소련공산당 당중앙(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소련군정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 후보자에서부터 정당 및 성분별 비율까지, 후보자 개개인의 사상과 일제하에서의 활동 등을 엄격하게 심사한 다음 소련공산당 당 중앙의 재가를 받았다. 스티코프의 일기가 바로 김일성과 북한이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의 괴뢰정권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남한이 ‘유엔의 자손’이라면 북한은 ‘스탈린의 자손’인 셈이다. 국호·헌법까지 소련이 만들어줘 북한의 정치 드라마는 스티코프의 책상에서 기획되어 연해주군구와 소련군 사령부 지도자들의 회의에서 확정되면 스탈린의 재가를 얻은 후 소련군정에 전달되었다. 소련군정 사령부는 북한 지도부를 독려하여 기획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드라마의 대본과 한국인 출연자들을 준비시키고 기획자의 최종적인 결재를 받아 드라마를 연기했다. 스티코프의 책상에서 기획되어 모스크바 당 중앙의 재가를 얻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명단 하나하나가 소련군정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었다. 형식상으로 투표를 거쳤는지는 몰라도, 지구를 반 바퀴 도는 요란스러운 기획 및 결재 과정을 거쳐 모스크바 당 중앙의 의지대로 선출된 대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북한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가 출범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뿐만이 아니라 아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 이름과 헌법까지도 소련공산당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스티코프 일기를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이 한국임시위원단 조직을 결정하자 나흘 뒤인 11월 8일, 북한은 헌법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선 임시헌법’ 작성에 착수했다. 그런데 헌법의 작성자는 북한 헌법학자가 아니라 소련공산당이었다. 소련군정은 1947년 말부터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정하고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법률 전문가들에게 동유럽 위성국들을 창설할 때 작성한 헌법을 참고하여 북조선 헌법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이 초안을 소련 외무성과 소련공산당에 보고하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세부적으로 검토한 후 평양의 소련군정에 지령하여 1948년 2월 초에 헌법안 작성을 끝냈다. 1948년 4월 24일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북한의 헌법문제에 대하여’를 결정했다. 이날 모스크바 교외 스탈린의 별장에서 스탈린, 몰로토프 외상, 즈다노프 서기, 그리고 주북한 소련대사 스티코프가 참석한 가운데(북한 인사 중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북한의 국가건설, 즉 헌법 제정으로부터 독립에 이르는 내용이 결정되었다. 북한 헌법과 그 이후 국가건설계획의 골격이 이날 모스크바에서 결정되었다. 스탈린은 스탈린 헌법에 따라 작성된 북한 헌법 초안에 대해 제2장, 제14장을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은 전적으로 스탈린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작품이다. 소련은 이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조선 임시헌법 제정위원을 선정하라고 지령했다.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남조선에서 미국인들이 유엔 임시위원회의 협조 하에 금년 5월 10일로 예정된 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 단독정부를 수립한 뒤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북조선 영내에서 실시하고 최고인민회의 선거(남한의 총선에 해당)를 실시하며 내각제 정부를 수립하라”고 그 시기와 방법까지 세세하게 지령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스탈린 헌법의 영향이었다는 점에 대해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조선인민은 위대한 스탈린 헌법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의 영향이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스탈린 헌법은 그 천재적인 기초자가 말하고 있듯이 파시스트의 야만성과 싸우려는 모든 사람들, 특히 오늘날 미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맞서는 전사들의 최전선에 있는 조선인민에게 정신적인 원조와 실제적인 지지를 주고 있다.” 모든 것이 스탈린 뜻대로 남한에서 제헌의회가 제헌헌법을 만들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던 1948년 7월 31일, 소련군정은 북한의 초대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남한의 국회의장단에 해당) 결정을 위해 한 달여 심의에 돌입했다. 스티코프 일기에 의하면 북한의 정부 조직 및 각료 인선 문제도 자신의 지시에 의해 준비되고 연출되었다. 소련은 남한의 장․차관에 해당하는 상(相)․부상(副相)의 인선은 물론, 최고인민회의 회의 장소와 청사, 내각 청사, 정부 선언문까지 작성하여 김일성에게 넘겨주었다. 스티코프의 지시를 받은 발라사노프 정보팀은 추천된 인사들의 경력과 소련에 대한 충성도 등을 세밀하게 조사하여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냈다. 소련군정 사령부가 초대 내각 구성원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을 선정하면서 가장 중요시했던 부분은 소련에 우호적인지의 여부, 북한에서 실시한 소련 정책을 지지하는지의 여부였다. 소련군정은 이 기준에 근거하여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을 배치하고 그 명단을 김일성에게 넘겨주어 9월 9일 발표하도록 했다. 그런데 명예직과 권위 있는 정부의 상(相·장관) 자리는 국내파와 연안파 등에게 양보하고 실질적인 권한을 쥐고 있는 내각의 주요 부상(副相·차관)에는 소련파들을 집중 배치했다. 얼굴마담 자리는 다른 파벌에 넘겨주고, 실권은 소련 출신들이 차지하는 ‘2중 구조’ 내각 형태를 만든 것이다. 1948년 9월 8일, 평양시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제1차 최고인민회의 5일째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승인하고, 이날부터 “전 조선 지역에서 인공 헌법을 실시한다”고 공포했다. 이어 최고인민회의를 이끌어갈 의장단과 상임위원회 위원장단, 상임위원 등을 선출했다. 소련군정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이 수상으로 선임됐으며, 내각 조직을 김일성에게 위임했다. 다음날인 9월 9일 오전 10시, 김일성 수상은 소련공산당 당 중앙이 결정해준 내각 성원 명단을 발표했고, 대의원들은 만장일치로 내각 구성을 승인했다. 이어 김일성 수상이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3년에 걸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시와 평양 주둔 소련군정 사령부의 기획 및 연출에 의해 소련의 위성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했다. 모든 것이 스탈린의 뜻대로 된 것이다. 이것이 북한 건국의 숨길 수 없는 민낯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칼럼 내용을 석 줄로 요약한다. 1. 북한의 건국절인 9․9절은 스탈린의, 스탈린에 의한, 스탈린을 위한 북한이 탄생한 날이다. 2. 북한의 초대 내각 수상은 물론 각 부처의 상․부상(장․차관), 최고인민회의 의장단(국회의장단)과 대의원(국회의원)들은 소련 당중앙이 충성 심사를 거쳐 선정해주었다. 3. 북한 헌법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나라 이름도 소련공산당 작품이다. 무식이 죄다 이따위 사이비 괴뢰집단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민주․자주․주체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정신 나간 짓이 백주에, 그것도 중인환시리(衆人環視)리에 자행되고 있다. 이 나라의 학교와 언론, 포털과 영화관에서는 애오라지 김일성의 가짜 항일투쟁만을 무뇌아처럼 되새기고, 저들의 날조된 주장을 확대재생산 하는 작업에 시간과 비용과 노력과 정열을 아끼지 않는다. .......................................................................................................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 (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 전 월간조선 편집장)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9038 [ ...... 해방초기 소련군정을 지원하고 김일성 빨치산파와 함께 북쪽을 통치해나간 중심세력은 소련파였다. ........ ] [ ..... 실권을 쥐는 부상(차관)자리는 고려인이 장악 ....... 고려인이 부상을 차지하지 못한 성은 하나도 없을 정도 ........ ..... 각 도당 위원장은 대체로 고려인이 ...... 당중앙에서도 조직부장 허가이, 선전선동부장 박창옥 등이 장악 ........ ] [ ..... 소련파는 .... 스탈린에 의해 「수령」으로 정해진 김일성의 충실한 부하였다. ........ ] 소련파 입북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 [중앙일보] 1991년 11월 14일 ◎ 김일성 집권 터 닦은 「정치일꾼」 / 소 지시로 5차례 2백여명 평양 도착 / 50년대초까지 당·행정기관 요직 장악 해방초기 소련군정을 지원하고 김일성 빨치산파와 함께 북쪽을 통치해나간 중심세력은 소련파였다. 소련국적이거나 또는 소련에 살고 있는 고등교육을 받은 일단의 한인들을 소련정부는 북한통치에 투입했다. 이것은 물론 한국인이고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을 동원해 군정을 용이하게 운영하겠다는 행정적인 의도도 있었지만 그와 함께 장차 소비예트화할 북쪽의 지도자로 내밀하게 정한 김일성을 지원하기 위한 정치적인 사전준비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생활 경험이 풍부하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어서 해방후의 북한을 급속하게 장악, 북한사회의 골격을 만들어냈다. 45년 8월 하순부터 46년 9월까지 북한에 파견돼 직·간접으로 김일성 정권을 도왔던 한인들은 줄잡아 2백여명. 그후 50년대 중반까지 개별적으로 입북한 인사들까지 합하면 모두 4백27명이라는 증언도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북한에서 문화성 부상을 지내다 57년말 소련으로 되돌아가 소련 카자흐공화국 수도 알마아타시에 있는 한인신문 고려일보 부주필로 있는 정상진씨(73·일명 정율)의 증언. 『정치일꾼으로 참여한 이른바 정통 「소련파」 2백여명은 편의상 입북시기를 기준으로 1진부터 5진까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소련군 88특별여단 소속으로 김일성과 함께 입북한 「빨치산파」등 60여명은 제외된 것입니다.』 ........................................................................ 이들 소련파의 총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허가이. ○허가이가 핵심인물 그는 소련에서의 풍부한 당사업 경험과 실무능력으로 김일성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산파역을 수행했다. 「당박사」로 불렸던 그의 배후에는 소련군사령부와 소련파로 불리는 대규모의 「고려인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내무성부상을 지내다 억지 사상검토끝에 소련으로 탈출한 강상호씨(83·레닌그라드 거주)의 증언. 『소련군사령부의 기본정책은 명예직과 권위있는 정부의 상(장관)자리는 국내파와 연안파 등 타파에 양보하고 실권을 쥐는 부상(차관)자리는 고려인이 장악토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내무상은 연안파의 박일우에게 넘기고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은(후에 사회안전성) 소련파인 방학세를 시켰지요. 48년 1차내각때 고려인이 부상을 차지하지 못한 성은 하나도 없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당기관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조선공산당 분국이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6·25까지 「팔도장군」으로 불리는 각 도당 위원장은 대체로 고려인이 점했습니다. 이와 함께 당중앙에서도 조직부장 허가이, 선전선동부장 박창옥 등이 장악하고 있었지요.』 이같이 잘 조직된 인맥을 가진 소련파는 총수 허가이를 중심으로 스탈린에 의해 「수령」으로 정해진 김일성의 충실한 부하였다. ................................................................................................... http://pdf.joins.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199111140053 ****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 - 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11.15 김규식(金奎植).김두봉(金枓奉)등 남북정치지도자들의 회담이 소련측의 주도면밀한 각본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김구선생 암살당할것 예견했었다 〈관계기사 8面〉 이같은 사실들은 中央日報가 창간 30주년사업으로 추진중인 현대사 자료발굴과정에서 단독 입수한 소군정(蘇軍政)정치사령관과 민정사령관을 겸임했던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 소장(少將.92년5월 모스크바에서 90세로 사망)의 일기 형식 비망록(대학노트 크기 1백97쪽)에서 밝혀진 것이다. 지금까지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에 대한 소련측의 의도와 역할, 蘇군정의 북한정권 수립과정 등이 문건으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망록에는 북조선 인민위원장 김일성과 북조선 노동당 위원장 김두봉이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 대표 김규식등 이른바 「4金회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에게 『헌법은 채택하지만 당분간 내각은 구성하지 않고 김구.김규식 두 선생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헌법을 통과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계획』이라고 제의, 두 정치지도자를 회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 함게 蘇군정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이 남북(南北)지도자 연석회의를 결렬시키거나 회의에서 퇴장하면 이들을 「미제(美帝)간첩」으로 폭로하는 대책을 수립해 놓았다. ................................................................. 비망록에는 소군정이 소련군 극동(極東)사령부 정치위원이자 스탈린의 북한문제 전권대사격인 스티코프 대장(大將)의 재가를 받아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한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열겠다고 발표하고 연석회의에 김구와 김규식을 평양으로 불러 들여 ▲남한의 총선 반대와 분쇄 ▲유엔 한국(韓國)임시위원회 조선(朝鮮)에서 추방 ▲소.미군 철수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남북총선거는 외국군 철수후 실시 등 한반도의 소비에트화를 위한 4가지 지침을 관철토록 김일성에게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 위해 소군정은 「혁명논리와 투쟁전략」을 주 내용으로 연석회의 참석자들의 결의문에 해당하는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사전에 작성해 남한대표들에게도 이같은 지침을 미리 시달하여 지침 내용대로 연설을 준비토록 지도하라고 했다. 소군정은 또 북한 정부 수립 두달전 김일성이 수상과 민족보위상(국방부장관)을 겸임하고 박헌영(朴憲永)은 외무상만 맡도록 하는등 초대 수상과 내각,최고 인민회의 상임의장단 등에 대한 후보명단을 작성해 모스크바「중앙」(소련공산당 중앙 위원회 또는 스탈린을 지칭)에 상신했으나 「중앙」이 남한인사들이 소외됐다고 지적, 김일성은 수상만 맡고 박헌영은 제1부수상겸 외무상, 남로당(南勞黨)의 이승엽(李承燁)을 사법상, 조선인민공화당 당수 김원봉(金元鳳)을 검열상으로 각각 추가 시키라고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소군정은 이밖에 남북 정치협상의 와중에서도 인공기와 인민군기를 속히 제작하도록 김일성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들은 지금까지 남북연석회의와 북한정부 수립등을 소군정이 주도했을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을 해왔을 뿐 이를 증명할만한 소련측의 사료가 없었으며 특히 이들 과정 모두를 김일성이 주도했었다는 북한 당국과 한국의 일부 주장을 정면으로 뒤엎게 된 계기가 됐다. . https://news.joins.com/article/2970187 <평양의 4김회담> 1. 46년만에 밝혀진 南北정치협상 진상 [중앙일보] 1994.11.15 ◇ 3월24일 (확대회의에서 김일성에게 지시) - 南北韓 정세보고는 김일성파,김두봉파,허헌파(남로당 위원장 박헌영이 보고를 못할 경우) 3개 그룹 대표가 한다. -의견을 교환한 후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을 채택한다. -회의 일정을 채택한다. 〈회의첫날〉 1,개회사 2,주석단-당수,단체 지도자들 3,회의 순서와 절차 채택 ※축사- 김두봉.김구.허헌.김규식.김달현(북조선 천도교청우당 당수).이극로(건민괴 대표).최용건(조선민주당당수).김원봉(조선인민공화당)8명 축사자의 이름을 밝힌다. 회의경축공연은 합창과 오케스트라. 〈회의 2일째〉 1,첫 문제에 대해 3통의 보고- 토론은 15분 2,첫번째 문제에 대한 결정서 작성을 위한 위원회 선출 〈회의 3일째〉 1,토론 후 첫번째 문제에 관한 결정서 채택 2,두번째문제 보고자는 허헌(보고내용은 선전효과와 조직에 대해 강조할 것) 〈김일성에게 지시〉 ▲48년 8월15일까지 소련과 미국정부에 보내는 소군과 미군 철수에 관한 메시지를 채택할 것 ▲남한의 총선을 반대 분쇄하기 위한 투쟁위원회를 결성할 것 ◇3월25일 (당)대회에서 중앙검열위원을 선출하지 말라고 김일성에게 충고했음. 당에서는 노동자가 우선이다. 근로대중의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노동당. 노동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설을 기초로 한다.(여타 민주적 정당들도 마찬가지) 〈김일성 보고〉 ▲국내정세=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해 남조선 국민은 미국을 의심하고 있다. ◇3월26일 (남조선 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일체의 라디오를 통제하라고 김일성에게 지시. 〈스티코프와 회담(20시30분)〉 1,북한 인민들은 다른 당의 (남북 연석회의에)참석을 반대하지 않는다. 2,조선인민은 미군정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없이도 조선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3, 2~3일간 더 기다리자. 그래도 오지 않으면 신문기사를 내거나 기자회견을 통해 성명을 발표한다. 4, 남북대표자 연석회의는 모스크바 결정을 기반으로 한다. 누가 (蘇美공위)결렬시켰으며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벌써 3년동안 정부 없이 허송했다. 모스크바 결정을 관철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즉 정부가 이미 수립됐을 것이다. 일치 단결하여 당은 사업을 잘 한다. 단결만이 이런 결과를 가져다준다. 4,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자료준비가 중요하다. ▲대회에 대해서는 보안을 유지한다. ▲스티코프가 불가닌(국방부차관)을 만나기 위해 월요일에 모스크바에 간다. 남북 연석회의에서 제정당의 단합을 반드시 강조하고 기타 소수정당들을 격려해야 한다. ◇3월27일 북로당 제2차 당대회 개회. 참석인원 9백90명(여자 1백42명) ▲노동자 4백61(46.6%)▲고등교육 1백44(14.5%)▲농민 2백56(25.9%)▲중등교육 1백95(19.7%)▲사무원 2백32(23.4%)▲초등교육 6백51(65.8%)▲기타 41명(4.1%) 김일성의 총화보고에 대해 16명이 발언했다. 토론에서 ○김구와 김규식의 평양초청에 따른 문제와 ○(반당적 요소가 짙은) 오기섭에 대해 집중 토의했다. ◇3월 31일 〈김일성에게 지시〉 김창만(북로당 선전부장)이 소련을 비판하고 다닌다. 우리는 앞으로 그를 신임하지 않을 것이다. 당대회 개회사를 할 늙은이를 고를 것. 〈스티코프에게 문의〉 ▲조만식을 연석회의에 초청하거나 만나겠다는 문제가 제기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남한 기자들을 회의장에 출입시켜야 할지.이들이 연석회의를 어떻게 보도할까.북한 기자들의 출입은 ▲연석회의에서 소련군 사령부의 축사 가 필요한가 ▲기타 정당 단체 대표들에게 발언권을 부여해야 할지 ▲이회의를 임시인민회의(전조선을 대표한)의 성격으로 부여할 필요는 없는지 ▲회의에서 꼭 만장일치를 고집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아도 되는지. ◇4월2일 서울방송에 의하면 김구 김규식 중도당들이 우리가보낸 연석회의에 대한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아마 그들이 동의한것 같다. 〈문일(김일성 비서.소련파)의 남한정보 보고〉 김구 집에서 연석회의에 초청된 당수들이 회의를 갖고 앞으로 평양에서 개최 될 연석회의에 대한 대책을 토의했다. 회의 식순과 어떤 노선을 택해야 할지 등이 집중 토의됐다고 한다. -남한기자들이 앞으로 개최될 연석회의에 대해 딘 미국소장에게 질문 -연석회의에 대한 당신의 의견 ▲우리는 선거를 준비중이므로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당신은 남한 대표단 평양수송에 협력하겠는가 ▲우리는 북으로부터 초청 받은 사람들이 북한에 가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고,협력도하지 않겠다. -남한의 주요 지도자중 한 사람인 김구가 방북을 한다면 안내할 의향은 ▲김구는 북한 가는 길을 모르는가. 기차도 있고 자동차도 있지 않은가. 소련군사령부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했다. 우린 더 이상 입북 신청을 하지 않겠다. 김구등은 회의 일정 등 문제를 북측과 사전에 협의하기 위해 자신들의 대표를 북에 보낼 예정으로 알고 있다. 〈스티코프에게 남한에 대한 정보보고〉 ▲국경이 모두 닫혀 있다 ▲군대와 경찰이 아주 많다.계속 감시를 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대책을 전화로 지시해달라. ◇4월2일 4월3일 새벽 3시에 청년대표단이 도착한다. 그들을 마중해야 한다. 그들에게 음식과 돈을 지급하도록 지시했다. . <평양의 4김회담> 2. <해설> 蘇군정 남한정세 손금보듯 [중앙일보] 1994.11.16 비망록 내용의 대부분이 지금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다가 처음으로 공개된 것들이다. 1948년 3월25일밤 평양방송을 통해 4월14일 평양에서 「남북 정치협상」을 개최한다고 발표한 평양주둔 소군정(蘇軍政)과 북한지도부는 남한의 좌익세력등을 통해 미군정(美軍政)과 남한의정세를 면밀히 파악해가면서 김구(金九)와 김규 식(金奎植)의 입북 지연 대처방안 등 남북정치협상에 대한 전략을 짜나가고 있음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 소군정과 북한지도부는 회의를 여러차례 연기해가면서도 김구와 김규식의 입북을 기다리면서 이들 두 지도자를 기여코 참석시키려는 의지가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두 지도자의 입북과 회의 참석을 관철시키기 위해 김구에게 언론.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참석자들에게 비용까지 지원할 것을 결정했다. 소군정의 이같은 의도는 두 지도자가 법통을 갖고 있는 임정(臨政)의 대표이자 당시 남한의 대표적 정치지도자였기 때문에 소련의 「민주기지」인 북한정권수립의 정통성과 두 지도자의 상징성을 감안한 고도의 전략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의 두 김씨가 남한의 두 지도자에게 직위를 주고 헌법 채택이후 범민족 정부를 구성할 계획」이라고 회유한 것 등도 같은 의도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소군정(레베데프)은 김구가 남한의 단독선거를 막는데 과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국민들의 신임도가 어느 정도인지 등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모스크바=金局厚연구위원] . <평양의 4김회담> 3. 蘇, 김일성에 신문보도 일일이 지시 [중앙일보] 1994.11.17 ◇ 1948년 4월 9일 〈소련군 극동(極東)사령관 비루소프 암호전문〉앞으로 조선에 대한 모든 지시는 나를 거쳐야 한다고 스티코프동지에게 전하라. 그는 나의 정치부관이지 소련대표가 아니다. ○북조선에 스탈린의 초상화가 너무 많다(레베데프 지적). ◇ 4월 12일 〈스티코프 전문〉 김일성에게 아래와 같은 신문보도문을 전달하라. 북조선 정당과 사회단체의 요청에 의하여 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부는 북조선의 민주정당과 사회단체 초청으로 평양에서 개최되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북하는 남조선의 정당.사회단체들의 입북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성명했다. ○4월12일 현재 평양도착. △백남운(白南雲.근로인민당부위원장)과 비서 2명 △나승규(羅承圭.민중동맹조직부장) △홍남표(洪南杓.남로당 중앙위원) △허성택(許成澤.조선노동조합전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