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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용 人의 生을 剝하야써 我의 生을 肥코저 하는 感情에서 出함이 아니요. 我의 有를 發揮하야 人我가 共存共榮하자는 理性에서 一切의 所費를 그 商品의 本價우에 添付치 아니할 수 업슨즉 그만한 利金을 부티지 아니하면 計算이 되지 아니하니까 1921.2. [ ..... 우리가 經濟的으로 努力하자 함은 人의 生을 剝하야써 我의 生을 肥코저 하는 感情에서 出함이 아니요. 我의 有를 發揮하야 人我가 共存共榮하자는 理性에서 ....... ] 經濟方面으로 爲先할 일은 개벽 제8호 1921년 02월 01일 ................................................................................................................ 第七. 自由競爭의 市場에 立하야 어떠한 不足으로 因하야 朝鮮人의 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 不及하는가를 恒常 注視할 일. ..................................................................................................... 第九. 一般의 經濟的 生産 或은 經濟的 宣傳을 賢行함에 至하야는 한갓 外人 或은 外貨를 嫉妬排除하는 態에 出치 말기를 期할지니 是는 우리가 經濟的으로 努力하자 함은 人의 生을 剝하야써 我의 生을 肥코저 하는 感情에서 出함이 아니요. 我의 有를 發揮하야 人我가 共存共榮하자는 理性에서 發하는 것일세며 且 市場의 自由競爭은 억지로 左右할 수 업는 故이라. 다못 問題는 우리가 根本的으로 自覺하야 또 참뜻 참마음으로써 自由市場에 立하야 큰 것에와가티 또 적은 대에서 말보다도 行에서 眞珠가티 토실토실한 結晶을 지을 것 뿐이다. 그리하면 今日 一般의 豫想하는 것보다도 좀 가까운 時日안에 比較的 쉽도다 하는 喜悅裡에 우리의 經濟界도 庶幾할 것이다.<13> 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ma_013_0080_0040 [ ...... 그 理由는 거긔에 運搬費가 붓고 仲介人의 手數料가 잇고 또 商人側으로 보면 그 집貰, 使用人 給料, 그 物品이 곳 팔리지 못하면 그 本價金에 대한 利子 其他 一切의 所費를 그 商品의 本價우에 添付치 아니할 수 업슨즉 그만한 利金을 부티지 아니하면 計算이 되지 아니하니까 ........ ] [ ..... 작은 일, 큰 일에 압서는 것은 돈이나 都是 그것의 不給 때문에 어찌 할 수 업는 것이 今日의 우리가 아닌가. ....... 이 크다라한 經濟的 憂慮의 소리는 不知中에 合하고 또 合하야 듸디어 우리 一般을 擧하야 産業的 運動을 開始하게 되엇도다. .... 「우리도 남과 가티 살어야 하겟다.」 ..... ..... 經濟的 壓迫으로부터 脫出할 道를 講究치 아니하면 이것이고, 저것이고 손을 대여 볼 수가 업겟다. ...... 이제부터의 우리야말로 生存競爭場裡의 新勇士가 되는 셈이며 이 싸움의 勝負이야말로 우리의 民族的 死活을 判斷함이 될지로다. ....... ] 우리의 産業運動은 開始되엇도다 개벽 제15호 1921년 09월 01일 金起瀍 ........................................................................................................ 나는 어느 날 鍾路 某雜貨店에서 펄렁펄렁하는 넥타이 하나를 삿는데 1圓95錢을 주엇다. 그런데 암만 보아도 그러케 갑이 만흘 것 갓지는 아니하얏다. 그러나 그 갑을 주지 안코는 살수가 업섯다. 그 일이 암만하야도 마음에 켱기어 하루는 京城工業專門學校에 단기는 K君에게 그 實物을 보이며 이것을 손수 짜서 지을 것 가트면 그 갑이 얼마나 되겟는가 한즉 40錢內外이라 한다. 40錢 內外의 原産物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에 1圓4,50錢의 딴돈이 附加된다 하야서야 消費者의 苦痛이 넘우나 甚치 아는가 하야 이를 다시 雜貨業하는 某友에게 그 內容을 探問한즉 그 某友는 나에게 이러케 말하야 주엇다. 友 『그 넥타이를 大阪都賣商으로부터 直輸入할 時는 每一件에 60錢이오. 만일 그것을 京城 진고개 日本人都賣商으로부터 購入할 時는 1圓20錢이며 그것을 鍾路나 其他에서 散賣할 時는 1圓90錢 或은 2圓이 되는 것이다.』 記者 『그러면 우리 朝鮮商人들은 모다 大阪으로서 直輸入하는가.』 友 『直輸入도 하지마는 만히는 진고개의 商人으로부터 間接輸入하는 것이니라.』 記者 『웨 直輸入을 行하지 못하는가.』 友 『勿論 計算上으로 보면 直輸入하는 것이 可하겟지마는 우리 朝鮮人에게는 그러케 될만한 交通의 길이 열리지 못하얏다. 交通의 길이라 하면 普通으로는 汽車汽船을 聯想할지나 그러나 그것은 交通의 機關은 될지언정 直接 그것이 交通의 길은 아니니 적어도 商業上 意味에 在한 交通의 길은 能히 그 去來할 相對方의 言語文章을 通하며 그곳의 商慣習을 解得하며 또는 그곳의 新聞雜誌를 購讀하야써 그곳 經濟界의 變化를 暸知한 然後에 비롯오 彼此間 交通의 길이 열리는 것이니 우리 朝鮮商人은 이만한 商事經營上의 實力을 所持치 못하얏스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저것을 생각할 것도 업시 무슨 因緣으로나 市內의 어떤 都賣商과 去來를 始하얏스면 十年이던지 百年이던지 그대로 因襲할 뿐이오. 거긔서 한 거름 나아가 어떠케 하면 더 조흔 輸入方法이 잇슬가 하는 것 가튼 일은 꿈에도 생각지 아니하니라.』 記者 『그것은 學術的 知識을 應用하여 하는 商業이 아니오. 商人中의 多數는 오즉 從來의 因習을 그대로 遵用하는 일이라. 依例히 그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商人들의 原價 5,6拾錢에 不過하는 것을 2圓을 밧는 것은(16) 넘우 無理가 아닐가. 이뿐 아니라 내가 日前에 本社 代理部에 委托하야 上海로부터 腕卷時計 한 개를 부텨왓는데 關稅 아울러 其價가 14圓이라. 이를 南大門通 某時計店에 보내어 이곳의 市價를 探한즉 적어도 25圓은 주어야 되겟다 하니 其故- 如何오.』 友 『그것은 알고보면 족음도 異常한 일이 아니지. 問題의 넥타이로 말할지라도 大阪서 60錢하는 것이 서울 진고개에 와서 都賣가 되면 1圓20錢되고 또 한번 구을러 散賣가 되면 2圓이 되는 것을 볼지라도 商品은 原産地를 遠隔하면 遠隔할스록 其價는 高하는 것이라. 그 理由는 거긔에 運搬費가 붓고 仲介人의 手數料가 잇고 또 商人側으로 보면 그 집貰, 使用人 給料, 그 物品이 곳 팔리지 못하면 그 本價金에 대한 利子 其他 一切의 所費를 그 商品의 本價우에 添付치 아니할 수 업슨즉 그만한 利金을 부티지 아니하면 計算이 되지 아니하니까…』 記者 『그러면 結局의 損害는 最多數者되는 消費人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거긔에 대한 그대의 생각이 어떠한가.』 友 『勿論 消費者의 損失이 되고 마는 것이다. 損失을 防備할 對策으로는 (一)一日이라도 速히 朝鮮工業의 發展을 策하야 多數의 商品은 그 原産地를 朝鮮內로 하게 할 것. (二)不得已 外國에서 輸入할 것이면 間接輸入을 그치고 直接輸入을 行하되 그리하기 爲하야는 商業上의 學文을 修得하야써 機械的 賣買뿐이 商事가 아니라 頭腦로 經營하는 것이 商事임을 事實로써 나타내이게 할 것. (三)消費者된 自身은 消費組合과 如한 自護機關을 設置하야써 될 수 잇는대로 原價에 近한 代價로써 商品을 交換할 것을 取할 것 等이라.』고. 産業運動開始의 經路 經濟的 哀話로써 右의 두 가지 例를 적엇다. 그러나 어찌 이뿐이리요. 試하야 今日의 우리 朝鮮사람들로 하야금 一時, 그 모든 所云爲를 그치고 經濟的 壓迫으로부터 어든바 哀話를 적어보라 하면 누구나 다 이만한 例는 들것이다. 試思하라. 今日 우리들의 움직이고저 하는 어느 곳에서 經濟的 壓迫에 遭遇치 아니한 적이 잇는가. 우리는 훌륭한 目的으로 어떠한 會社를 組織코저 한다. 그러나 株金이 拂込되어야 하지. 新聞雜誌를 經營코저 한다. 代金이 回收되어야 하지. 무슨 會務의 發展을 圖코저 한다. 또한 돈이 잇서야 하지. 其他 한낫 學校를 세우고저 할지라도,(17) 아니 한낫의 講習所를 세우고저 할지라도 돈 때문에 實現이 困難하며 其外 작은 일, 큰 일에 압서는 것은 돈이나 都是 그것의 不給 때문에 어찌 할 수 업는 것이 今日의 우리가 아닌가. 그래서 「이 돈을 어떠케 하면 어들 수가 잇스며 이 艱難한 生活을 어떠케 하면 裕足한 生活로 化할가」함이 우리 一般의 晝宵焦慮하는 바이엇다. 구름이 자조 보이면 비가 나리는 세음으로 이 크다라한 經濟的 憂慮의 소리는 不知中에 合하고 또 合하야 듸디어 우리 一般을 擧하야 産業的 運動을 開始하게 되엇도다. 그 著例는 지난 7月 30日로써 發起總會를 열은 全鮮産業大會의 組織 그것이며 天道敎靑年會에서 特히 實業部를 둔 것이며 朝鮮勞働共濟會에서 消費組合을 到處에 施設하는 中에 잇는 그것이며 其他 團體 團體, 個人 個人間에서 互相産業發展의 策을 講究하는 것이 다 그것이라. 가만히 近年來 우리 사람들의 自覺의 經路를 보면 「우리도 남과 가티 살어야 하겟다.」하야 물불을 헤아리지 안코 從來 惰力의 桎梏中에서 뛰어나온 것이 그 始作이오. 『그러면 어떠케 하여야 남과 가티 살겟느냐. 오라! 爲先 남과 가티 알아야 하겟다.』하야 敎育의 必要를 부르지즌 것이 其二요. 『敎育도 하여야 하겟지마는 爲先 目前의 經濟的 壓迫으로부터 脫出할 道를 講究치 아니하면 이것이고, 저것이고 손을 대여 볼 수가 업겟다.』하야 産業的 運動을 일으킨 것이 其三이라. 우리의 나아가는 길도 이리하야 漸次 佳境에 드는 셈이오 우리의 하는 일도 이리하야 더욱 深酷한 맛을 띄게 되도다. 이제부터의 우리야말로 生存競爭場裡의 新勇士가 되는 셈이며 이 싸움의 勝負이야말로 우리의 民族的 死活을 判斷함이 될지로다. 經濟力面의 歷史的 閒却 말하자면 우리 朝鮮사람은 여태까지 經濟問題를 모르고 산 셈이엇다. 經濟問題는 (一) 一般的 奢侈의 容認 (二) 人口의 異常한 膨脹 (三) 强隣의 經濟的 侵掠 이 업시는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런데 從來의 우리 朝鮮에서는 어떠 하얏는가. 멀리는 말하지 말고 李氏朝鮮에 들어온 以後를 볼지라도 (一)克己的 儉德을 무엇보다도 尊重한 儒敎의 文化 미테서는 一般의 奢侈를 絶對로 否認한 同時에 一般社會에서는 器具나 食糧品가튼 實用物을 需要하는 以外에는 다시 무엇을 求할 것이 업섯스며 딸아서 器具나 食料品을 製造하는 者 側에서도 一般의 實用에 適하게 함으로써 標準을 삼앗슬 뿐이오 그 以上으로 如何히 하면 一層 需要者의 奢侈心을 (18) 滿足케 할가 하야 現在 以上의 技巧를 加하며 더 새로운 發明을 行함과 가튼 생각은 할 까닭이 업섯다. 그 當時에 잇서 或 누구가 異常한 奢侈品을 가젓거나 또는 製造한 者가 잇섯다 하면 그는 곳 社會의 罪人이오 國法의 罪人이엇다. 이것은 곳 直接으로 商工業의 藝術의 發達을 沮止함이 되엇스며 間接으로 一般의 經濟的 慾望을 減殺케 하야 스스로 經濟的 方面의 일을 閑却케 함이 되엇다. (二)人口問題로 말하면 勿論 때로 增減의 다름은 잇섯슬 것이나 醫療機關의 不備와 其他 社會制度의 缺陷은 近日 日本이나 獨逸과 가티 異常하게 人口가 膨脹한 事는 업섯슬지며 또 잇섯다 할지라도 그 當時는 朝鮮內에도 荒蕪地가 多有하야 그곳으로 移殖할 수가 잇섯는 바 人口의 膨脹으로 經濟問題가 생길 理가 업섯다. (三)强隣으로 말하면 中國이라 하는 나라가 업섯슴은 아니나 그 나라에도 亦是 우리 貌樣으로 經濟問題가 업섯는 바 經濟的 掠奪을 行할 理가 업섯스며 그곳으로부터 多少의 貢物을 要한 일은 잇섯스나 이것은 經濟的 侵略을 意味한 것이 아니라 寧히 服屬의 意思를 表示케 하는 手段에 不過하얏던 것인 바 經濟問題에는 何等의 影帶이 업섯다. 다못 從來에 잇서 經濟問題가 일어나는 때는 어느 때이엇는가 하면 年事가 凶하야써 穀物이 不足하게 되는 그 한 때이다. 그러나 年事의 凶은 全道가 同一하게 되는 例는 極稀한 故로 南道가 凶하면 그 穀을 北道로부터 移하며 北道가 凶하면 그 穀을 南道로부터 移하거나 또는 그 前年의 秋取 때에 各戶로부터 相當한 穀物을 거두어써 그 翌年의 窮春 或은 窮夏에 補不足하는 賑貸制度를 設하야써 當面의 問題를 解決하얏섯다. 勿論 이러한 制度가 잇섯다 할지라도 그 運用의 失宜로 因하야 凶年에는 餓莩가 道에 橫한 일이 업지 아니하얏스며 또 平年일지라도 班常의 關係와 貧富의 懸隔으로 因하야 生活上 塗炭에 빠진 사람이 업지 아니하얏스나 그 때의 그 細民들은 그것으로써 到底히 免할 수 업는 運命의 所定으로 認할 뿐이오. 어떠케 하면 그 困境을 벗을 수 잇슬가 하야 自己가 무슨 새로운 企業을 策하거나 그러치 안흐면 經濟的 制度의 改善을 圖함과 가튼 일은 夢想도 못하얏던 것이다. 이러케 저러케 되어 從來의 우리는 經濟問題를 몰랏스며 그들의 一般精神은 오즉 立身揚名의 一事에 集中하게 되엇섯다. ........................................................................................................................ 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ma_013_0150_0030 ........................................................................................................................... 주석 김구는 임정청사에서 잠자고 밥은 동지들 집을 기웃거리며 얻어먹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청사 월세가 불과 30원, 고용인 월급이 20원인데 이것을 낼 돈이 없어 소송이 줄을 잇는다. ......................................................................................................................... 1886.7.29. [ .... 부세도 200만 석(石)이 못되고, 군사도 수천 명에 불과하니 .......... ...... 중국 .... 정병이 30만이고 전선(戰船)도 100여 척(隻)이 되며 해마다 들어오는 수입도 6,000만 석(石) ........ ] ...................................................................................................................... 원세개(袁世凱)가 ‘조선 정세를 논함〔朝鮮大局論〕’이라는 글을 써서 의정부(議政府)에 보냈다. 그 글의 내용에, “조선은 동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 나라로서 영토는 3,000리(里)에 불과하고 인구는 1,000만 명도 못되며 거두어들이는 부세도 200만 석(石)이 못되고, 군사도 수천 명에 불과하니 모든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빈약한 나라입니다. 지금 강대한 이웃 나라들이 조여들고 있는 때에 사람들은 안일만 탐내고 있습니다. 역량을 타산해보면 약점만 나타나서 자주 국가로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강국의 보호도 받는 데가 없기 때문에 결코 자기 스스로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자연적인 이치로서 천하가 다 아는 것입니다. ........................................................................................ 중국의 병력이 구주만 못하지만 정병이 30만이고 전선(戰船)도 100여 척(隻)이 되며 해마다 들어오는 수입도 6,000만 석(石)이나 되므로 만약 일부 부대를 출동시켜 조선을 점령하려고 한다면 돌로 달걀을 깨듯이 쉬울 것이다.’ 라고 하니, 어떤 사람이 비웃으면서, ‘공의 말과 같다면 이것은 조선이 중국를 몹시 두려워한다는 말인데 중국도 조선이 중국를 두려워하듯이 오히려 구주를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구주를 방비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므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렇지 않다. 중국은 영토가 넓고 백성들이 많으며 나라 안은 태평하다. 그래서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사람들을 죽여 들판에 차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진 사람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지 구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프랑스와의 전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고종 23권, 23년(1886 병술 청 광서(光緖) 12년) 7월 29일(경신) 3번째기사 원세개가 조선 정세를 논함이란 글을 써서 의정부에 보내다 1904 -- 1910 이승만 '독립정신' [ .....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 ] [ ..... 通商(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3. 오늘날 通商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 .....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 ] ........................................................................................................... 29세의 李承晩,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李承晩이 1904년 獄中에서 썼다가 출옥한 뒤 출판했던 '독립정신'을 읽어보면 그는 20代 후반에 이미 정신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는 느낌이 든다. ........................................................................................... ‘독립정신’ 에는 ‘요약과 결론’에 해당하는 ‘後錄’이 있다. 여기서 뽑은 말들을 소개한다. 이 글이 104년 전 29세의 조선 청년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자.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1.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2. 通商(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3. 오늘날 通商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4.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5. 외국인들을 원수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둘째, 새로운 文物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1.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2.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3. 외국인의 압제에 대해선 싸워야 한다. 외국인에게 뭇매를 맞은 한국인이 그 외국인을 죽이고 경찰에 자수한 일은 칭찬할 것이 못 되지만 그 의지는 본받을 만하다. 4. 동양의 옛날 책보다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책들을 공부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5. 과거의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조차도 버리고 바꿀 수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사람과 가정과 나라가 모두 새롭게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영국과 미국과 같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힘쓰면 일본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6. 물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하다. 7. 신학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8. 공부하는 것은 잘 살기 위한 투자이다. 9. 유학을 간 사람은 나라를 위해 시급한 것부터 공부하여야 한다. 귀국할 형편이 못 되더라도 뿌리치고 반드시 귀국하여 어두운 세상에 등불이 되어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 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 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 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1.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2. 다른 사람의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 우리 집 종이나 다른 사람들의 하인, 또는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존중해야 한다. 3. 개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서 폐단이 있더라도 윗사람들이 어느 정도 손해를 보는 것이 옳다. 3.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활력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활력이 생겨서 몇 십 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 httpkorea318.comclientboardview.aspsEtpnum=7342&sEtpTp=BA01&cPage=11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哲人통치자 李承晩이 선물한 자유가 국가경쟁력의 源泉이다. 趙甲濟 1963 박정희 [ ..... 경제 재건 .... 제1위적인 지표 .... 우리는 총력을 여기다 경주(傾注)해야 ........ 경제 재건 없이는 우리가 항시 부르짖는 민족의 자주요, 자립이요, 국가의 독립이요, 개인의 자유요, 자유민주주의요 하는 것은 전부 다 공염불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에 있어서 모든 비극이라든지 불행이라는 것은 그 대부분이 전부 우리가 못살고 가난한 여기에서 전부 기인한다 ....... ] 04 2024 MAGAZINE 조갑제의 시각 다시 듣는 1963년 대선 당시 朴正熙의 光州 유세 녹음 테이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낸 박정희 최고 연설 글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무장한 예언가’ 박정희의 61년 전 선거 연설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였나 .................................................................................................... ⊙ “가난 퇴치 없이는 나라의 독립도 개인의 자유도 없다” ........................................................................................................ 1963년 10월 3일 광주서중 교정에서 열린 박정희 후보의 연설 ................................................................................................... 이번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그야말로 우리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행사가 되겠습니다. 이번 선거야말로 우리 민족과 국가의 흥망 진퇴를 판가름하는 역사적인 고비가 될 것이고, 우리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고,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게 살아왔습니다’ ................................................................................................................ 이날 박정희 연설의 주제는 가난 극복이다. 그는 당시 한국인의 굴욕적 삶의 근원을 가난으로 본다. 〈우리는 지난날 너무나 가난하게 살아왔습니다. 빈곤과 굴욕과 후진이란 것은 먼 옛날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대대로 우리에게 물려준 악(惡)의 유산입니다. 그 빈곤이라는 굴레를 우리는 오늘 현재도 벗지 못하고 신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1961년 박정희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 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 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최하위권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한국과 같은 해에 유엔과 미국의 도움으로 건국했던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이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 또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아프리카 짐바브웨(당시에는 로디지아)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살았다. 〈오늘날 세계는 달 로켓이 발사되고 달 세계의 개척에 대한 문제가 논의가 되고 우주를 개척해야겠다는 우주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지금도 저 시골에 들어가면 지금부터 수천 년 전 태고(太古) 원시 시절의 그 생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새까만 어두운 밤에 호롱불, 등불 하나로 아직까지 원시적인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과거에 못살았는가. 왜 우리는 현실에서도 이렇게 못사는가. 여기에는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5·16 직후 비서실에서 일하던 노태우(盧泰愚) 대위로부터 가난 실태를 보고받은 적이 있다. 강원도 경북 산간 지방의 화전민(火田民)들 중에는 겨울에 동물처럼 겨울잠을 자는 풍습이 있다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음식만 섭취하고 계속 잠만 자면서 체력 소모를 방지하던 사실상의 신석기(新石器) 시대의 삶이었다. ...................................................................................................................... “경제 재건 없는 자유민주주의는 공염불” .......................................................................................................... 〈그러면 앞으로 제3공화국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겠는가 첫째는 정국의 안정을 이룩해야겠습니다. 둘째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확립해야 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자립경제를 기필코 달성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창한 민족적인 과업을 제3공화국에 있어서 우리가 시행하기 위해서는 여기에는 꼭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적인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을 국민 여러분들이 뽑아주셔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제3공화국에 있어서 경제 재건이라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문제요, 동시에 우리 국가 목표 중에 있어서도 가장 제1위적인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총력을 여기다 경주(傾注)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제1차 5개년 계획은 이다음에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든 이것은 기필코 완성을 해야 되겠고 또한 1차 5개년 계획이 완료하면 제2차, 제3차 5개년 계획을 계속 추진을 해서 이 나라의 자립경제 바탕을 기필코 우리 모든 민족의 집결된 역량으로 꼭 달성해야 되겠다는 것을 저는 제3공화국에 있어서 부탁을 하는 바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경제 재건 없이는 우리가 항시 부르짖는 민족의 자주요, 자립이요, 국가의 독립이요, 개인의 자유요, 자유민주주의요 하는 것은 전부 다 공염불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에 있어서 모든 비극이라든지 불행이라는 것은 그 대부분이 전부 우리가 못살고 가난한 여기에서 전부 기인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허리띠 졸라매야” 그는 만악(萬惡)의 근원을 가난으로 파악한 다음에 자립경제를 건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간단명료하게 말한다. ‘나라의 독립과 개인의 자유도 경제적 자립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은 위대한 각성이다. 이런 원리가 힘없는 지식인이 아니라 ‘무장한 예언가’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동양적 실용정치의 원조 관중(管仲)이 2600년 전 중국 전국(戰國)시대에 한 말 ‘창고가 차면 예절을 알고, 의식(衣食)이 족하면 영욕(榮辱)을 안다’는 뜻과 통한다. 그는 사실과 현실을 딛고 꿈을 이루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죽을 때까지 ‘4자(自)전략’을 밀고 나갔다. 자조(自助)정신-자립(自立)경제-자주(自主)국방-자유(自由)통일. 박정희의 대전략은 간결했고 일관성이 있었다. ................................................................................................................. 여기에는 처음에도 제가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든 국민들이 앞으로 몇 년 후에 우리의 경제를 자립을 시키고 보다 잘살 수 있는 번영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은 우리가 먹을 것도 덜 먹고 입을 것도 덜 입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우리가 좀 더 땀을 흘리고 노력을 하고 근면해야 내일의 행복이 올 수 있고 우리의 자립경제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겁니다. ..............................................................................................................................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2404100030 1965 [ ...... 북괴경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외국의 자연자원에 의존 않을 수가 없을 것이며 수출진흥 이외에 원료와 산업시설(자본)을 장만할 수 있는 방도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 1965.1.30. 동아일보 사설 [ ...... 무역전쟁의 시대 ........ 무역전쟁에서 이기자고 한 것은 우리의 국가목적과 국민의 진로를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서 높은 평가를 ....... ] [ ...... 수출이냐? 죽음이냐? 양자를 택일하여야 ....... 남북대결에 있어서도 무역전쟁에서 모든 승부를 결정 ........ ] [ ...... 기업인이 모리배라고 멸시당하고 비난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무역전사로서 국민의 숭앙을 받아야 ........ 국민들의 성원이 반드시 뒷받침 되어야 ........ ] 무역전쟁에서 이기자 대통령은 지난 28일 부산에서 열린 생산기업인대회에서 '이 시점은 바야흐로 무역전쟁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동시에 기업인들의 수출의욕과 생산품의 질적향상을 촉구한 것은 기업인들 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다같이 되새겨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국가간의 번영경쟁이 제2차대전을 계기로 하여 무력전적 양상으로부터 경제전쟁의 면모로 바뀌어지고 있는 것은 뚜럿이 눈에 띄어지고 있으며 경제전쟁은 무역전쟁에 의하여 싸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그러기에 무역전쟁에서 이기자고 한 것은 우리의 국가목적과 국민의 진로를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서 높은 평가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국민생활 수준을 남들보다 낫게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남들과 같은 수준에까지 올리지 못하는한 정부나 국가의 존재의의까지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없을만큼 경제번영과 국민생활수준향상에의 요청이 다급해진 이때인만큼 대통령의 그 연설은 '언즉시야'라고 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자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에서도 지금 무역경쟁을 사투하고 있거든 하물며 자연자원이 빈곤하기로 세계에서 으뜸가는 한국에서 수출이냐? 죽음이냐? 양자를 택일하여야 한다고 한 대통령의 주장은 털끝만큼도 과장이 없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것도 물론이다. 특히 휴전 이래 우리의 대공투쟁은 경제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 누가 경제를 더 잘 번영시키고 누가 더 잘 사느냐 하는 경쟁에서의 승부가 모든 분야에 걸친 판가름을 낼 것도 환한 사리에 속한다. 물론 남북대결에 있어서도 무역전쟁에서 모든 승부를 결정한다는 것도 소연한 사리다. ............................................................................... 경공업제품에 있어서 북괴 상품이 남한 것과 비교조차 안된다고 함에 다툴 여지가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거니와 북괴의 시멘트가 국제시장(향항)에서 5불 내지 8불(톤당)밖에 못받는데 남한 것이 11불50선으로 수출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북괴제 선반(견본)이 아무리 싸다 하더라도 자유국가에서는 쓸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등을 헤아려서 북괴의 중공업제품(기계) 역시 문제시 할 것이 못된다는 견해는 씹어 볼만한 것인 듯하다. ................................................................................... 남한도 북한도 자연자원에 있어서 빈곤하다는 점에 있어서 피장파장한 것이 실정이니 북괴경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외국의 자연자원에 의존 않을 수가 없을 것이며 수출진흥 이외에 원료와 산업시설(자본)을 장만할 수 있는 방도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수출진흥은 외국상사들과 불을 뿜는 경쟁에 이기지 않고서는 안될 노릇인데 사유재산제와 이윤을 부정당하고서 수출시장을 개척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극난한 작업이란 것에 다툴 여지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의 수출경쟁의 라이발들은 자유국가군이 안될 수 없으므로 우리 기업인들은 자유국가의 수출상들과 겨루는 전사로서 출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물론이다. 정부가 수출진흥에 특별한 시책을 안할 수 없는 것도 그런데 까닭을 두고 있는 것이고 기업인이 모리배라고 멸시당하고 비난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무역전사로서 국민의 숭앙을 받아야 할 이유도 그러한데 있는데도 그렇지 못한 것은 그 책임의 일반은 기업인들 스스로가 져야 하겠으나 정부와 국민 일반의 인식 부족에도 일반의 책임이 있다는 점을 명찰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무역전쟁에서 이기자고 한 것은 단순한 구호로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수출에서 이길 수 있는 정부의 시책과 기업인의 노력과 국민들의 성원이 반드시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바이다. 우리가 언제고 일본기업을 이겨야 하는 것 아이가 - 이병철-이건희 부자(父子)2대의 극일(克日)집념 이병철, 삼성전자 수원공장 지을 때 일본의 히다치보다 3만평 넓은 43만평 고집 , 언젠가 (일본과) 대등하게 이야기할 날 올 것 글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1970년대 삼성전자가 수원에 공장을 지을 때 이병철 회장은 “죽어도 공장 부지를 43만 평으로 해야겠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일본 히다치 공장이 40만 평인데, 그것보다는 커야 하지 않겠노 우리가 언제고 일본 기업을 이겨야 하는 거 아이가 어디 내 말이 틀렸노” 이병철 회장은 1987년 삼성전자가 개발한 4MD램 반도체가 “전부 일본 것을 베꼈다”는 언론보도를 보고, 이른 아침에 수원의 삼성반도체로 달려가 연구책임자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가 일본 것 베꼈다는 게 사실이가 기껏 남의 거 베끼라고 내가 평생을 걸고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줄 아나” 진대제 박사를 비롯한 연구진들은 “처음에 시작하는 것이라 그렇다. 곧 우리 기술로 만든 반도체를 내놓겠다. 믿어달라”면서 이 회장을 달랬다. 몇 주 후 이병철 회장은 세상을 떠났다. 일본의 원로 경제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씨는 10년 전 조선일보 선우정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이병철 회장은 자기를 만날 때마다 “한국인은 결코 자질이 나쁜 국민이 아니다. 우수한 국민이다. 단지 역사와 시스템 결함 때문에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라면서 “그러니 반드시 격차를 메울 수 있다,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셨다”고 말했다. 선우정 특파원이 “정말로 ‘따라잡겠다’고 말씀하셨나요”라고 묻자 하세가와 씨는 이렇게 답했다. “여러 번 들었습니다. ‘하세가와 상, 당신은 일본인이라 유쾌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일본을 능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이요. 참 힘들지만 회사를 키우면, 언젠가는 대등하게 (일본과) 정면에서 이야기할 날이 올지 모릅니다’라고 말했지요. 일본의 힘이 아주 강할 때 그는 도전했고, 결국 세계 1위를 만든 것입니다.” 하세가와 씨는 이병철 회장을 혼다자동차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에 비견하면서 “공격적으로 파고든 강한 집념이 서로 닮았다”고 말했다. “무엇에 파고든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꿈에. 일류기업이 되겠다는 꿈이었지요. 수십년 동안 꿈을 잃지 않고 꿈을 계속 추구한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병철 회장의 못다 한 꿈은 이건희 회장이 물려받았다. 1970년대에 사재(私財)를 털어가면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던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제1성으로 “세계 일류기업으로의 도약”을 선언했다. 그리고 정말로 삼성을 세계 일류기업으로 끌어올렸다. 기자의 대학시절에만 해도 소니가 만드는 워크맨을 흉내 낸 ‘마이마이’나 만들어 팔던 삼성은 오늘날 시가 총액이나 이익 면에서 일본의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상위 전자업체 3~4개를 모두 합친 수준으로 올라섰다. 일본이 한국을 경원(敬遠)하기 시작한 시점은 삼성이 소니를 앞지르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얼마 전 어느 노(老)소설가는 일본 유학 다녀온 사람들을 친일파로 모는 소리를 했다. 이병철 회장은 와세다대학을 다니다 말았고, 이건희 회장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그 ‘친일파’들이 일본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