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천원이 없던 우리집 형편과 아버지에 대한 추억”...
때는 1973년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따뜻한 어느 봄날의 이야기다. 토요일 수업을 마친 후 담임 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여행경비 천원을 못낸 아이들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냐”며, 졸업여행 경비를 안건으로 제시하셨다. 여러가지의 제안된 안건이 진행되는 가운데 어떤 아이가 “선생님! 이런 방법이 어떨까요? 라”며, 제안을 했는데, “여행경비를 못낸 아이를 위해서 친구들이 대신 부모님을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이 부끄러워서라도 주시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담임 선생님은 즉시 그 아이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천원의 여행경비를 내지 못한 두 세명의 아이들 집에 친구 두 명을 붙여 마을별로 보내는데, 여행경비 천원을 못내는 아이들 중 나도 그들 중에 포함이 돼 있었다. 학교에서 걸어서 5분여 거리에 있는 우리 동네는 몇 십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새터’라는 조그만 마을이다.
학교를 출발해서 친구들과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데, 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천원을 못 받아 오면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챙피해서 어떻게 할까” “아버지에게 혼나면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한 끝에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나는 길 옆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서 친구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친구들이 오기까지 버드나무에 달라 붙어 있는 ‘무당벌레’를 잡아다가 달리기 경주도 시키고 같이 놀고 있는데,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친구들은 천원권을 손에 흔들며, 야~동수야! ‘받았다’ ‘받았어’를 연발하며, 뛰어왔다.
나도 덩달아 기뻤으며, 너무 기분이 좋아 날아 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해서 꿈에도 그리던 우리는 수학여행을 가게되었다.여행지는 진주시에 소재한 관광지(촉석루-진주박물관-KBS-진양호)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천원이 없어 빌려서 여행경비를 주셨는데, 출발하는 월요일 아침, 어머니에게 용돈을 달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치를 채신 어머니가 어디서 구하셨는지 오십원을 호주머니에 넣어 주시며, 적어도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또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웃집에 사시는 고모께서 백원을 주셔서 백오십원의 용돈이 모아졌다. 친구들에 비해 적은 용돈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만족해 했었다.
첫날은 촉석루, KBS를 견학했으며, 중앙극장에서(장욱제.태현실 주연)영화 ‘여로’를 봤는데, 필름에 불빛을 비추자, 영화 시작 전 광고가 시작 되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리를 찾는 사람들의 머리가 영상 불빛을 가리면 영상실에서는 좀 앉자요 앉자 하는 소리를 쳤다.
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지금도 그 때 영화 장면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극장 로비에는 바다풀과 열대어가 들어있는 유리로 된 수조가 있었는데, 열대어가 노는 모습이 궁금하고 재밌게 보여 극장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여러번 반복했던 것 같다.
친구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한참 보고 있는데, 같은 마을에 사는 조대용이와 나는 극장에서 나와 극장 맞은편 포장마차에서 용돈으로 난생 처음 먹어보는 ‘도나스’와 오뎅이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국물과 같이 배가 터지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 때 아버지가 뒷집에서 천원을 빌려 주시지 않았다면 어릴 적 동심에 얼마나 큰 멍이 들었을까 생각하면서 오십 중반이 된 지금도 가끔 사람들에게 그 때를 이야기하며 웃곤 한다.
신라 헌강왕 광산김씨 37대 손으로 태어나 평생을 정직과 성실로 살아온 우리 아버지 김영래 공은 동네 사람들에게도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한가한 시간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 건너편 정자나무 아래도 특별한 경우 아니면 안 가시는 분이셨다. 어릴 때부터 바라 본 아버지는 잠시라도 쉬지 않으시고 항상 일을 하셨다. 무엇을 하시더라도 꼼지락 거리는 분이셨고 늘 손에서 일이 떠나지 않으셨다. 비가 올 때도 고모집에 있는 지푸라기 새끼 꼬는 기계에서 새끼를 꼬시더라도 잠시를 그냥 계시는 분이 아니셨다.
평생을 살면서 양복 구경을 못하고 사셨는데, 동생이 경찰공무원이 되고 나서 받은 첫 월급으로 한 벌을 아들한테 선물 받으셨다고 자랑하셨다.
아버지는 빈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들이 없는 작은 집으로 양자와, 우리 5남매를 키우면서 평생에 한 번도 옷 투정과 반찬투정 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신 적이 없으시다. 항상 할머니가 잠 깨시기 전에 일어나 할머니가 기거하시는 사랑방에 군불을 넣어 주셨다. 그리곤 아침에 사랑방 문을 열고 할머니가 주무시는 이불 밑에 손을 넣어 보시며 “어머니 방이 따뜻하십니까?” 물어보셨다. 할머니와 방을 같이 사용했던 나는 잠결에 늘 아버지의 문안인사 소리를 듣곤 했다.
어릴 때서부터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셨던 아버지는 6.25가 끝나고 군대를 가셨는데, 휴가 중에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모아 놓고 말씀을 하시면서, “자기들은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며 “휴가를 나와 복귀하는데, 어머니가 글을 몰라서 군복 명찰을 거꾸로 달아 놓았다”며, 늘 우리에게 배움을 강조하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 아버지에게 배운 것은 큰 아버지가 마산에 이사 가서 사셨는데, 글은 아셨지만, 문장력이 없었던 아버지께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 호롱불을 내려놓고 가르쳐 주신 것은 편지지에 ‘큰 아버지 전 상서’라고, 편지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아버지에게서 배운 글 공부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아래 윗 동네에서 소문난 효자셨다. 유난히도 우리 5남매 중에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할머니 치맛속에 많이 숨어서 살았으며, 할머니가 먹다 남은 하얀 쌀밥은 내 차지였다. 혹 동생들이 그 쌀밥을 맛 볼려면 내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콩가루가 귀한 시절, 저녁에 입이 궁금할 땐 가끔 먹다 남은 밥으로 비벼 주시기도 하셨다.
아침에 일찍 소를 몰고 논을 갈기 위해서 아버지는 우리 이름을 가끔씩 부르시는데, 늘 할머니는 동생이 나가도록 하기 위해 나를 불러도 대답하지 말고 숨을 죽이고 있으라고 적은 소리로 일러 주시곤 하셨다. 할머니의 보호아래 나는 늘 열외는 했지만, 한참 잠에 취해 있는 동생을 아버지가 부르면 동생은 늘 울곤 했는데, 동생의 우는 소리에 나는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순간까지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마음이 편치 못했다.
우리 할아버지 김복현 공은 늑막염으로 내가 세 살 되던 해 60대 초반에 돌아가셨는데, 할머니 말을 빌리자면 일본에 돈 벌러 가서 무거운 짐을 지는 일을 늘 많이 하셨기 때문에 지게 멜빵에 눌러서 어께가 항상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고 한다. 그게 늑막염의 원인이 된 할아버지는 돈이 없어 병원에 한번 내원하고는 가지 못하셨고, 옆구리에 물을 한번 뽑으면 한 세수대야가 나왔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내가 삼년만 더 살았으면 좋을텐데, 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고 한다.
딸만 셋인 할아버지는 아들 없는 서러움 때문에 며느리가 시집와서 아무것도 않해도 좋으니, 아들만 한방 가득 낳아 달라는 말씀을 늘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낳은 손자라서 그런지, 할아버지는 생전에 큰 손자인 나를 땅에 한번 내려 놓지 않으시고, 늘 손 바닥에 올려놓고 길거리를 돌아다니셨다고 한다.
어머니와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는 큰 손자라는 명분으로 동생은 걸리고 장남인 나는 할머니께서 항상 엎고 다니셨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야곱이 12형제 중 요셉만을 편애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야기다. 두 살 아래인 동생은 고향에서 경찰공무원을 하고 있는데, 어릴 적 동생에 대한 그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잘 해주고 싶고 좋은 것이 있으면 다 주고 싶은 마음에 늘 잘 되기를 기도한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원 과정을 수료 할 때 까지 딱 한번(지난 81년 유난히 추웠던 겨울)학부형으로 학교에 찾아 오셨다. 집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걸으면서 학교 생활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평생 제일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 같다.
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돌아오는 차편이 없어 역 대합실에서 난로를 쬐면서 밤을 지새웠는데, 너무나 피곤하고 힘든 밤을 세웠다. 수업을 빠지지 않기 위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턱이 얼어붙어 상하 운동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있었기에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밟고 간 운동화 자욱을 보면서 부자의 정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떠올려 봤다. 왠지, 오늘 따라 그 아버지가 그렇게도 보고 싶다. 그 아버지께서 내 곁에 살아 계셨더라면 차로 모시고 어디든지 구경을 시켜 드릴 것인데, 평소에 효도하지 못한 생각에 늘 후회가 된다. 길을 가다보면 늘 지나가는 노인들을 만나는데, 구부러지고 초췌해도 아버지라고 불러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아버지의 자리가 그렇게 큰 줄 늦게 깨달았습니다.
